남상학의 시솔길
 
 

login 
  
제목 : 철길 / 김정환 
                                    [애송시 100편 - 제 89편]  

            
             ▲ 일러스트=권신아


                           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해설>  -정끝별·시인----------------------------------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나직이 되뇌면 생각의 꼬리가 철길처럼 길게 이어지곤 한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는 순간 수수께끼라도 떠안은 듯 뒷말을 잇도록 한다. 김정환(54) 시인은 '철길이 철길인 것은'을 되뇌며 (철)길과 만남과 희망을 엮어 이렇게 노래한다. 만날 수 없음이 이리도 끈질기기 때문이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되뇌면 신촌역, 성북역, 용산역, 서울역을 오가던 아련한 철길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철로도 아니고, 철도도 아니고, 바로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이 인간 안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길은 두 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길과 또 하나의 길, 한 사람의 길과 또 한 사람의 길! 그 두 길은 서로 마주칠 수 없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서로 버팅김으로써 지나감의 속도와 무게를 견뎌내는 길이다.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는 길이지만,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시간의 누적인 역사(歷史)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1899년 제물포에서 노량진을 오가는 경인선이 첫 경적을 울린 이후 철길은 격동의 근대사를 달려왔다. 수탈하고 징병하고 피란하고 산업하러 가는 길에 철길이 있었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나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간다. 상경하고 귀경하고 입영하고 귀대하고 여행하는 곳에 늘 철길이 있었다. 그러니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에 자갈돌처럼 깔려 있는 기다림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너무 길고 외로워서, 철길이 두 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길이 철길인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철길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육교〉)고,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검붉은 눈동자〉)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고통도 절망도 이별도 끝이 있기 때문에 견딜 만한 것이고,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고, 결국 희망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한" 것이다. 당신이든 미래든 휴전선 너머든 완행이든 급행이든, 바로 그곳까지 달려가는 것이 철길인 것이다.

<출처> 2008. 4. 22 / 조선일보


 목록


no subject hit
165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정호승   
21588
164
무명도(無名島) / 이생진   
12992
163
그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8881
162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 황지우   
7253
161
바다 2 / 채호기   
3666
160
어부 / 김종삼   
5230
159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10298
158
갈대 / 신경림   
18888
157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29186
156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15304
155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10847
154
맨발 / 문태준   
12261
153
비망록 / 김경미   
9551
152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6124
151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10568
150
감나무 / 이재무   
10138
149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8535
148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5641
147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9925
철길 / 김정환   
6827
1 [2][3][4][5][6][7][8][9]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