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login 
  
제목 :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애송시 100편 - 제 90편]

            
              
                ▲ 일러스트 잠산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1947년>

<해설> -문태준·시인

   김광균(1914~1993) 시인은 1930년대 후반 회화적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 그는 시에 '회화(繪?)'라는 웃옷을 입혔다. 모더니즘 시론가 김기림은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광균의 시는 독자들의 눈앞에 한 장 한 장의 데생을 그려 보이는 작법을 구사했다. 이런 데에는 김광균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많은 화가와 직간접적으로 교우한 영향이 컸다. 김광균은 고흐의 그림을 처음 접한 충격을 이렇게 고백했다.

   "고흐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假橋)'를 처음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느낀 유럽 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계미술전집을 구하며, 거기 침몰하는 듯하여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했고, 내 정신세계의 새로운 영양(營養)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우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뎃상〉)로 표현했고, 흰 눈이 내리는 모습은""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했고, 성교당(聖敎堂)의 종소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로 빛나게 노래했다.

   마치 먼지 낀 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에서도 그는 공허하고 고독하고 스산한 마음을 '모양으로 번역'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낙엽을 보면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무가치한 지폐를 떠올리고, 폐허가 된 도룬(토룬) 시(市)의 공백(空白)한 하늘을 떠올린다. 구불구불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잎이 다 떨어진 포플러 나목(裸木)은 초라한 '근골'로, 불투명하고 얇은 구름은 '세로팡지(셀로판지)'로 표현함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대상을 조형한다.

   낙엽을 망명정부의 무용한 지폐에 비유하거나, 공장의 지붕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도시적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황량한 심사는 모색(暮色) 그득한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상실감과 창백한 감상(感傷)은 가족들의 죽음, 실향 등의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되었다. 해서 혹자는 김광균을 '엘레지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6년 12세의 나이로 '중외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면서 천부적인 시안(詩眼)을 자랑했던 김광균 시인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납북된 동생의 사업을 인수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렇지만, 그는 안개 자욱하던 한국 시단에 장명등(長明燈) 하나를 켜 놓았다. 아직도 그곳서 가늘고 고단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밤을 밝히고 있다.

<출처> 2008.4. 23 / 조선일보


 목록


no subject hit
165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정호승   
21588
164
무명도(無名島) / 이생진   
12992
163
그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8880
162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 황지우   
7253
161
바다 2 / 채호기   
3666
160
어부 / 김종삼   
5230
159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10298
158
갈대 / 신경림   
18888
157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29186
156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15303
155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10847
154
맨발 / 문태준   
12261
153
비망록 / 김경미   
9551
152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6124
151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10568
150
감나무 / 이재무   
10138
149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8535
148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5641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9924
146
철길 / 김정환   
6827
1 [2][3][4][5][6][7][8][9]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