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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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해설 / 인간의 순수, 청정무구한 삶의 근원적 탐닉 
<해설>


         인간의 순수, 청정무구한 삶의 근원적 탐닉    
                             - 시집 "저만치 그리움이 보이네"를 읽고 나서 -

  



                                                                     <우남일(禹南一) (評論, 崇義女高 敎師)



1〉올 여름 선생님과 함께 일본 배낭여행을 떠났다.
아소역에서 오이타, 삼나무가 우거진 산과 숲 사이로 난 열차의 차창에 쌍무지개가 뜬 것을 우리 일행은 보았다.
"선생님 이번에 시집을 내려고 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발문이랄까, 시 감상이랄까, 선생님이 좀 써 주세요"
아마 이런 대화였던 것 같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시집을 내신다?
교단에서의 정년 퇴임을 앞두고 생애 가운데 휴지부를 찍듯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첩을 정리하듯이 이제는 삶의 한 단락에서 구두점이 필요하였던 걸까.
그건 그렇고 하필이면 내게 부탁할 게 무언가. 난감했다.
이름 꽤나 날리는 문인들의 글을 웃기로 받아 시집을 장식하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천학비재한 후학에다가 직업적인 글쟁이로 정식 등록된 바도 없는, 그야말로 작품에 빛을 더하기는커녕 무게만 덜어갈 내게 왜 요청한 걸까.
대학 선후배 가운데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있고, 더구나 문단과 교분관계도 좋은 선생님께서. 아마 그럴지 모른다.
  이제는 허명(虛名)의 의장(意匠)을 벗어나 마치 속살을 드러내듯 있는 그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후학에게 진실을 내비치고 싶은 행간의 의미를 나는 읽어 내리고 있다.


〈2〉에드거알렌포우라는 미국의 소설가. ‘검정 고양이’ ‘모르드가의 살인’과 같이 괴기한 추리 소설을 즐겨 쓰는, 음침하고 끈적끈적한 밤골목을 누비는 스타일의 작가이다.
  그런데 그 포우가 쓴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있다. 학창 시절 연애편지에 어줍잖게 원어로 인용하여 낭송하곤 했던 그 유명한 ‘에나벨 리’라는 시를 많은 이들은 기억하리라.  무섭고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포우가 이런 아름답고 깨끗한 사랑의 노래를 지었다는 것이 내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만해 한용운 역시 그렇다. 기미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처럼 단호하고 분명한 분이다. 심우장을 북향집으로 지을 만큼 창씨 개명을 끝까지 거부할 만큼 추호도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강직한 성품. 만해의 사진을 보면 자비의 부처상이 아니라,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의 모습을 연상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분의 작품 속의 화자는 착하고 성실한 인종의 여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로 일관한 만해,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어쩌면 그리 부드럽고 나긋나긋한지. 이상도 하다.
  이처럼 인간은 야누스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30여 년이 넘게 교직을 지켜온 선생님에 대한 직장 동료 대부분의 인상은 거의가 ‘차갑다’ ‘깐깐하다’ ‘빈틈이 없다’ ‘논리적이다’라고 말들을 하는데 나도 대체로 동의한다. 선생님은 그만큼 얼굴표정에 감정 처리가 서툴다.
  헌데 선생님의 시편을 읽어 내리는 순간 각기둥과 같은 이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눈 언저리에 번지는 달무리/ 마음 깊숙이 젖어드는/ 한 모금 달빛/ 그건 물   안개 같은 욕망의 너울일까/ 풋풋한 사랑의 손짓일까〈‘불꽃’에서〉

  흐르는 석간수에/ 그윽한 차향을 풀어/ 울적한 심사를 다스리고 나서/ 풍경소리에 놀라/ 문득 고개를 들면// 유천(乳泉)으로 닦아낸/ 티없이 자비로운 햇살 속/ 저만큼 가슴을 열고 선뜻 다가와 안기는 두물머리〈‘오늘 하루만이라도’에서〉

  이윽고 산등성이 넘어온/ 바다 살결 같은 상긋한 바람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지다/ 해초들이 너울거리는/ 푸른 바다로 빠진다// 아득한 수평선/ 빈 가슴에/ 꿈 하나 새겨놓고 〈‘정상에 서면’에서〉


  아무렇게나 뽑아본 시구에는 시어 선택마저 부드러울뿐더러 따뜻하고 섬세하다. 다만 정갈스럽게 시의 독자를 불러들이는 깔끔한 식탁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선생님의 천성이리라. 메뉴의 절제, 정서의 제어는 속일 수 없다. 풍성한 시적 감성의 열기를 이 지적인 사유로 한 번 식혀서 내 놓은 것이다.


〈3〉50대와 60대 초로에 접어드는 8·15와 4·19의 세대들은 동숭동의 마로니에와 박인환의 시편들과 전혜린의 글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 에디뜨삐아프와 쥴리엣 그레꼬의 노래, 영화 카사블랑카와 무도회의 수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잔잔한 추억의 여운을 모은 선생님의 시첩 속에서 우리는 감미로운 샹송과 같은 멜로디를 듣게 된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늘 모자란 울음/ 그녀 옆에서 밤늦도록/ 진한 커피 한 모금 홀짝거리며/ 마른 목을 축이고 있었네〈‘불꽃’에서〉

  꽃가지 그늘 사이/ 출렁이며 넘실거리던/ 햇살의 빛살 속으로/ 러브 미 텐더 러브 미 트루/ 감미로운 선율이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 단물이 되어 뜨거운 가슴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네 〈‘복사꽃 추억’에서〉

  오솔길을 들어서면/ 잘 정돈된 커피하우스 한 집/ 지금 나는 새로 사귄/ 아라비카종 원두향에 푹 빠져 있습니다/ 통유리 밖 테라스의 허브 잎새가/ 전망 좋은 자리에 앉은 나를 반기며 손짓합니다 〈‘그 숲 속의 찻집’에서〉

  앞가슴을 풀어놓고/ 고즈넉히 누운/ 남한강 물가// 레드 산드라의/ 그윽한 향기/ 바람에 실려 너울너울 춤추고 있구나〈‘장미의 숲’에서〉


  마치 강변과 숲 속의 카페에서 라이브음악을 들으면서 엘리엇처럼 ‘인생을 티스푼으로 저울질’ 하는 풍경을 연상시키는 시편들이다. 이순에 들어선 반백의 세대가 고유하고 있는 시적 정서에서 선생님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증거이리라. 그 세대가 이제는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 저물 무렵 황혼의 언덕에 오른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과 말없이 흐르는 강물, 그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 밑 내면의 깊이가 잔잔하게 커피의 향훈(香薰)처럼 사색의 잔에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찻잔을 들고 창 밖으로 물안개 뽀얗게 피어오르는 새벽 강가를 바라보고 싶은 삶의 여유에 대한 유혹을 떨 굴 수 없는 연륜에 선생님은 도달한 것이다.


〈4〉그러나 선생님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삶의 토양은 파리의 상제리제 거리는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척박한 산하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그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선생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 국토에 대한 광적인 정도의 순례와 여행에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발작하듯 느닷없이 떠나는 선생님의 여행벽은 학교 행정 책임자로서의 고독과 반복되는 일상적 업무의 답답함에 대한 일탈 행위일까. 아무튼 선생님은 여행광이다. 기실 이 시집도 명확히 말하면 ‘기행시집’인 것이다. 마치 여행 중에 스케치북에 점묘(點描)하듯이 그려내는 시편들이 결코 가벼운 크로키는 아니다. 인생의 향기가 배어 있다.
  서울 인왕산에서 봉평, 추암, 향일암과 울릉도, 땅끝 마을에 이르기까지 이 한반도는 선생님의 발길을 맞아들인다. 그 발길이 닿으면 시의 손길로 거듭 태어난다.

  그리운 산하/ 그 품 속에 애틋한 젊음을 묻어두고/ 강물처럼 흘러간 사랑 그리워/ 정처없이 헤맨 / 아픈 세월들〈‘유월의 뻐꾸기’에서〉

  가슴을 풀어헤친 채/ 초록 비단으로 알몸 감싸고/ 산드러지게 누운/ 푼푼한 충청도 여인// 무에 급할 것 있으랴/ 풋풋한 향내로/ 하이얀 젖줄 물리고/ 발정난 화양천 굽이굽이/ 뭇 남정네의 발길을 잡는구나〈‘화양계곡’에서〉


  이렇에 우리 국토는 어머니로, 여인으로 치환된다. 이 세상 모든 남성들의 본향은 여성에 있기 마련이며,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지고(至高)의 여성상이 바로 모성이다.

  산 높아 골 깊은 곳/ 발길 멈추고// 마지막 남은 홍진(紅塵)/말끔히 씻어내면// 달마(達磨) 이마 머리/ 하얗게 부서지는 옥류(玉流) 〈‘옥류계곡’에서〉

  강호한정(江湖閑情)의 한국적 정서가 그대로 이어지는 시상 전개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고단한 삶 속에서, 인간사의 곤고함 속에서 탈속(脫俗)의 경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윤고산이 머물렀던 세 연정에 와서는, ‘한 점 미동도 없는/ 연못 속에/ 한 조각 구름으로 잠기어/ 수심 깊숙이/ 무심(無心)하라 이르시는 이 - (중략) -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록새록 살아오는 숨결/ 당신을 만나고 돌아서는 내 빈 마음 언저리에// 언제나 푸른빛의 샘/ 그윽한 풀내음, 솔향기 되어/ 당신의 문향(文香)이 스칩니다’(‘풀내음, 솔향기 되어’에서)라고 인간사의 한켠에 비켜서서 청정한 무욕의 마음을 그윽한 선비의 암향(暗香)으로 풍겨낸다. ‘억새밭’에선 ‘바람을 친구 삼아 수염 쓸며 나들이 떠나는 저 허허로운 광평추파(廣坪秋波)의 손짓은 또 무엇인가?
  세월의 언덕 너머 바다를 향하여 머리 빗고 기다리는 숙명 같은 그리움 혹은 하늘 끝 영원의 한 자락을 휘어잡고 싶은 고독한 시인의 독백’이라고 쓸쓸히 삶의 허무를 억새풀에 의탁하여 표현하고 있다. ‘너 나 구별 할 것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로/ 아슴아슴 산골짜기 돌아/ 한 마음으로 몸을 섞는/ 넉넉한 강물줄기/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 강물에 흔들리며/ 욕심 없이/ 풀잎 되어 흐르고 싶어라’(‘오늘 하루만이라도’에서)
  이렇듯 인간 본연의 순수함에 대한 희구, 청정무구한 삶의 근원적인 탐닉은 어렵잖게 찾아 볼 수 있다.
  ‘나 이대로/ 청청한 나무에 기대어/ 금산에 묻혀/ 영원히 살고 싶네// 안개처럼/ 바람처럼’(‘그 곳에 살고 싶네’에서) 끊임없는 여정이 주는 유랑의 자맥질, 저 망망한 바다를 향해 떴다 잠기는 반복의 무자맥질을 안개와 바람처럼 만상의 옷깃에 잠시 머물렀다 표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5〉삶은 관조할 수만은 없다.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고 저 멀리 시장터의 삶을 내려다보는 것은 참다운 삶이 아니다. 누구의 말처럼 피서객이 바라보는 바다는 아름답지만 어부가 살아가는 바다는 처절한 것이다. 문학에서 우리들의 생활이 제거된다면 그 시는 증류수와 같아서 세균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 몸에 정작으로 필요한 물이 아니다. 다행히 선생님의 시에서는 공동체적인 삶을 요구하는 그들의 눈길에도 외면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시적 관심의 지평이 넓은 것이다.

  "아니예요. 결코 피하려 하지 마세요. 저 성난 물줄기를. 비에 젖은 빈 배처럼 처연해야 합니다. 번지르르 탐욕으로 기름진 살들이 각진 스티로폼 조각으로 해체되어 둥둥 떠내려가야 합니다. 오만의 바벨탑이 천둥 번개에 무너지고 자연을 더럽힌 오욕의 쓰레기들이 철저히 청산되어야 합니다."〈‘대흥수’에서〉

  이렇듯 절규하면서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을 찾아가는 산토끼의 신비스런 동화가 깃든 거기’ 를 꿈꾸는 것이다. 초고속 열차가 들판을 달리는 안락한 사회를 살면서도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싶어하는 것이 시인들의 원초적 소망이다. ‘들려오는 소식은/ 서울역 지하도에/ 홈리스가 부쩍 늘어난다는 소식과 / 또 가출소녀가 돈 몇 푼에/ 팔려갔다는 소식’(‘인왕산’에서) 사회적 갈등에 대한 우울한 심사는 자연의 파괴에 대한 분노로 확장된다.
  그리고 분단의 현실에도 외면하지 않게 된다. '늙은이의 등가죽처럼/ 갈라진 대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져눕고/ 척박한 가슴에 언제부턴가/ 허옇게 혓바늘이 돋아/ 서투른 암호를 바람 속에 날려보낸다’(‘겨울 염전’에서)
‘삼백 예순 날 밤에도 잠들지 않는 섬. 그 어느 날 풍랑이 멎어 이 섬에 물안개 같은 안식이 찾아들까?’(‘섬은 잠들지 않았다’에서)
  이렇듯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의 한국 사회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남북의 긴장, 생태계를 작살내는 저 탐욕의 눈빛을 쏘아보기도 한다.


〈6〉그렇다면 선생님의 시적 여정의 귀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예감은 어렵지 않다.

  "고향을 떠나온 후 나는 바다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고향이 그리운 날 바다는 아예 내 눈썹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사계(四季) 중 여름이 더욱 그랬다. 바람 부는 창 밖 흔들리는 미루나무에서 넘실거리는 물결과 파도소리를 듣곤 했다. 때로 집채만한 파도가 덮치면 신열(身熱)이 오른 맨발의 아이는 (중략) 이제 지명(知命)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지도책을 펴들고 눈을 끔벅이며, 너무 길어 보이지 않는 길, 애처로운 길을 가다가 베갯머리에서 요즘도 내가 듣는 그 소리, 환청(幻聽)일까?"〈‘아련한 물길’에서〉

  영흥도, 제부도, 울릉도, 백령도, 제주도, 남해에 이르기까지 시적 여정은 유난히도 섬과 바다에 치우치고 있다. 이는 선생님의 유년시절의 감수성이 이작도에서 해면처럼 빨아들여졌다는 추억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은 연어만이 아니요, 귀거래사는 도연명만 착상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섬을 고향으로 둔 경우는 그 고립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유달리 짙게 마련이다. 그 유년의 공간은 소중한 것이기에 남몰래 내밀한 처소로 간직하고 싶어한다.

  "환한 햇살처럼/ 낯익은 화면 위로/ 오버랩 되는 자막/ ‘서해속에 감춰진/ 비경의 여름 피서지’ // 가슴 속 깊이/ 순수의 푸른 물 색깔로/ 나만의 보물처럼/ 숨겨두고 싶었는데/ 조용한 아침/ 누가 이 호들갑을 떠는가"(‘꿈의 방파제’에서)

  위의 시는 그 ‘보물’로 간직하고 싶었던 고향이 이제는 관광지로 변모하는 데 대한 아픈 정감을 토로하고 있다. 섬에 대한 애착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심상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섬에 대한 줄기찬 집착은 아래와 같은 절창(絶唱)을 낳는다.

  어느 날/ 이 바람 그치면/ 붉은 살점 같은/ 한송이 붉은 동백꽃으로/ 그리움 피어날까 〈‘도동항에서’〉

  그리고 사막과 같은 도회의 공간 속에서 지난 세월 열심히 살아왔던 삶, 젊은 시절의 끊임없는 성취동기, 이런 과거에 대한 회한과 허무를 묶어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마침내 ‘섬’은 지향점으로 한 인간의 생애를 지배하는 것 - 섬에서 태어나 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새들이 가지를 옮기는/ 숲 속 오솔길을 지나/ 거대한 욕망이 입을 벌인 터널과/ 뜨거운 불길이 달아오르는/ 사막의 한 복판을 지나/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달려왔습니다// 때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부서지고/ 양발에 굳은 살 못이 박히고/ 여기저기 생채기 무성한 채로/ 내 영혼과 육신의 참담한 질곡 어느 덧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또 하나의 길’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한 평생을 두고/ 저 멀리 바다 한 점 섬을 그리워하는 것" 〈‘땅끝 마을에 서서’에서〉

  "바다는 뭍의 끝이다. 더 이상 걸어 나아갈 곳이 없다. 종착지이다. ‘허겁지겁/ 끝없이 달려온/ 이 길들일 수 없는 자유/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이쯤에서/ 나의 발길 끝났으면 좋겠네 - (중략) - 자나 깨나 꿈꾸어 온 곳/ 아득한 수평선 위/ 멀리 가까이 나를 기다리는 그리운 자식 같은 섬들//이 조용한 항구의/ 낙조를 즐기는 하얀 물새처럼/ 호젓이 날개를 접고/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네"(‘이만하면 좋겠네’에서)


  사면 바다로 싸여 있는 작은 섬은 무엇을 표상하는 것일까. 김재홍의 해설처럼 인간 개체의 고독과 외로움, 한편으로 뭍과 떨어져 있어 고립화됨으로써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모든 것이 떠나 버린 뒤에 남는 단독자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것인가. 이와 함께 자기만의 성스러운 영역을 표상하는 것인가.
물론 선생님의 ‘섬’도 이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고갱이는 바로 ‘섬’그 자체 가 고향이요, 목적이라는 점이다.


〈7〉외딴 섬에 선생님은 혼자 선 것일까. 결코 홀로일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참된 신앙은 더불어 있기 때문에 기실 고독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목사의 설교가 아무리 다양해도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것은 결점일 수도 없고 비난할 것도 아니다.
  선생님이 찾아간 섬은 외롭지 않다. 절대자가 있고, 가족이 있고, 그리고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손녀가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으로 귀착된다. 한없이 하늘로 향하는 이상세계의 추구가 종내는 메델링크의 파랑새처럼 우리곁에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인지.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수없이 말하고/ 혀끝으로 수없이 거짓을 보태면서/ 작은 진실 하나에도/ 끝내 깃발을 들지 못하면서 비굴하게 살았습니다" 〈‘참회1’에서〉

  "제 살을 터뜨려/깊은 속울음 울 듯/ 나를 삭이며/ 흔적 없이 태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까맣게 타고남은 자리에/ 빛고은 새살을/ 돋게 하는 것입니다"〈‘용서’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참회’하고 자아와 타인을 ‘용서’하는 화해의 바다에 들어서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운 노년이 아닐까. 품질 좋은 숯이 뽀얀 재를 남기며 타들어 가듯이 곱게 늙어야 한다.

  "저것 좀 봐/ 순간 궂은 비 그치고/ 구름이 몰려가는 하늘에/ 다시 말갛게 얼굴 씻은/ 화사한 무지개가 걸리고/ 온 누리 꽃씨를 뿌리는/ 빛나는 하늘// 귀여운 아가야/ 아가야 "(‘저것 좀 봐'에서)

  귀여워서 죽고 못 사는 손녀에 대한 사랑에 이어 파뿌리가 되도록 살을 섞은 아내에 대한 찬미를 잊지 않는다. "햇빛 따사로운/ 은혜의 텃밭에서/ 척박한 땅 일궈/ 포도나무를 가꾸는 여인아// 상큼한 바람으로/ 맑은 눈을 가꾸고/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퍼올린/ 정한 샘물로 진액을 빚어/ 우리들 뜨락에 초롱초롱 푸른 별눈을 키웠구나"(‘포도원의 노래’에서)

  그리고 끝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그날 밤/ 어둠을 환히 밝히던 어머니는/ 숭늉 끓이는 주전자 속에/ 당신의 고뇌를 얼마나 풀어 끓였을까/ 다림질하는 기진한 손끝에서/ 치마폭 구석구석 몸져누운/ 외로움과 아픔의 자국들을 얼마나 지웠을까 (‘숭늉 냄새가 그립다’에서)

  손녀, 아내, 어머니, 누이 - 이 여성적인 심상이 신앙과 더불어 선생님의 시집 제4권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모든 남성을 타락시키는 것도 여성이지만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것도 여성이다. 부드러 움은 강함을 이기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일수록 깊다. 선생님을 페미니스트로 본다면 불쾌하실 것인가. 앞으로 어떤 변용을 보일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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