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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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나는 33년 6개월 숭의에서 근무하는 동안 몇 차례 시련을 겪었다. 첫 번째는 1985년 3월 초 학교가 재정 사고를 일으켜 부도가 발생한 것이다. 내가 교감으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법인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던 송화(宋樺) 교장은 재정 위기가 발생할 것을 예감하고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84년 12월 22일부로 나를 명목상 교장 직무대리로 발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2월 28일, 교장은 나를 불러 새학년도 개학식과 입학식을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유를 물은즉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날 나는 퇴근하면서 석간신문을 통해 학원이 부도가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교 자금의 무단 유출과 방만한 운영이 빚은 결과였다. 학교의 재정상태가 어렵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나 사건이 그리 쉽게 터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숭의학원 100년사》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부도 당시 법인 이사장은 박동선 회장의 모친 김순식 여사였으나 실질적인 이사장 역할은 박동선 미륭물산 대표 회장이 학교 법인 일을 겸무했었다. 그는 1985년 3월 2일 재정의 위급을 감지하고 갑자기 출국해 버리고, 법인의 송화 사무국장도 그 다음날 미국으로 잠적해 버렸다. 실질적인 책임자 두 사람이 없는 상태였기에 부도를 전연 막을 길이 없어 그 동안 발행한 어음과 당좌수표가 연쇄적으로 부도 처리되었다.”(427쪽 하단)  

   3․1절 공휴일을 지나고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송화(宋樺) 교장은 이미 학교에 없었다. 아니, 국내에 있지 않았다. 교장이 공석이 되자 나는 졸지에 실질적인 교장의 일을 맡게 되었다. 당장의 개학식과 입학식도 교장 대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부도 사건이 일간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실추된 학교의 명예가 제일 걱정이 되어 교직원과 학생들의 동요를 막고 학교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미 10년 전(1974년) 학원의 1차 부도사건이 발생했을 때 금전적인 피해를 본 교직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교직원의 금전과 크게 연관되어 있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고 이후 자금 사항은 최악이었다. 현금 100만원도 없는 상황에서 당장 학교 경영은 어떻게 하며, 곧 다가오는 교직원 봉급지불은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1분기 수업료는 조기 납부를 독려하여 재학생들의 90%가 이미 납부한 상태였고, 신입생들의 입학금과 수업료도 이자 상환 등으로 이미 써버린 상태였다.  그나마 10%의 재학생의 수업료는 채권자들이 몰려와 수납창구에서 압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는 사태 극복을 위한 의지를 표명하며 전 교직원에게 동요하지 말 것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당장 교육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상급기관인 서울시교육위원회(지금의 서울교육청)를 찾아갔다. 당시 교육위원회에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스승이셨던 선생님이 계셔서 먼저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딱한 사장을 들으신 선생님은 나를 학무국장과 부교육감을 만나 뵙도록 주선해 주셨다. 부교육감은 크게 걱정하지 말라며 교육현장의 동요는 막아야 한다며 지원을 약속하셨다. 나는 하늘을 날듯 기뻤고,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나의 적은 믿음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지원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당시 중학교는 고등학교와는 달리 교육청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교육위원회가 동일 학원 내 중학교에 지원할 금액을 앞당겨 지불하고, 고등학교에서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는 방법으로 우선 3월 고등학교 교직원 봉급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돌아와 이 사실을 간부들에게 즉시 공표했고, 3월 19일 관선이사가 임명되어 모든 일은 관선이사회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듬해인 1986년 11월 이준(李鐏) 선생을 새 이사장으로 영입하면서 학원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관선이사 체제의 1년 8개월간 학교의 안정은 전적으로 학교 책임자인 내게 있었으므로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1987년 나는 새 이사장 체재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 해 여름 뜻하지 않은 자연 재해를 겪어야 했다. 7월 27일 새벽 5시 경 서울 경기 지역의 집중호우로 남산타워와 연결되어 있는 남산 골짜기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엄청난 산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긴급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물과 흙더미가 테니스장을 덮치고 이어서 본관 건물을 휩쓸고 운동장까지 뒤덮여 있었다. 대학으로 이어지는 통학로와 고등학교, 중학교 복도는 물론 일부 교실까지 토사가 덮이고 운동장으로 엄청난 양의 토사를 쏟아냈다. 다행히 여름방학 중이고, 또 출근시간 전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각종 교육 기자재가 유실, 파손되고 시설 일부도 파괴되어 피해액이 5억여 원으로 집계됐다.
  
  학원은 대학 학장을 총책임자로, 각 교장을 기관 책임자로 정하고 수해대책본부를 설치했다. 이어 전교직원과 학생을 긴급 소집하여 복구 작업과 청소에 임했다. 학적부 등 주요 문서의 안전 반출, 교육 기자재의 점검과 보수, 건물 내 진흙 제거와 청소 등 교직원과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해나갔다. 그러나 가장 힘든 일은 토사로 덮인 대․소운동장의 토사를 걷어내어 정리하는 일과 수마가 할퀴고 간 건물 내 시설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곧 개학을 하게 되면 수업이 진행되어야 함으로 복구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사장이 회장으로 있는 삼풍건설산업(주)이 현장 소장과 직원을 파견하여 작업을 주도했고, 중구청, 수도방위사 공병대대, 중부 경찰서 기동대, 우성건설, 현대건설, 금영토건 등이 복구 작업에 협력했다. 만약 이준 이사장이 운영하는 삼풍건설산업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신속하고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의 100년사>에는 복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장비는 포크레인 연 51대, 페이로다 연 32대, 크람샤 6대, 덤프트럭 연 148대 등을 동원해서 752대분(5,400㎥)의 토사를 난지도로 반출했다. 그리고 (복구에 쓰인) 주요 자재는 레미콘 40대분(240㎥)으로 시멘트 700포, 모래 60㎥였고, 벽돌 80,000장과 철근 15톤이 사용되었다.」(448쪽 상단)

   대책본부는 후속조치로 문교부와 전국 수해대책본부에 피해 상황을 보고하고 보상을 청구했으나 피해 규모가 7억 이상이어야 지원대상이 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보상을 받지 못하고 결국 학원 차원에서 모든 경비를 감당했던 것이다. 중구청은 수해 재발 방지책으로 배수로 신설을 도왔을 뿐이다.

  재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숭의 가족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은 크게 돋보였다. 법인의 신속한 대응으로부터 동창회의 의연금, 학교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복구 작업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2학기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교실의 물을 퍼내고, 복도와 교실의 토사를 닦아내고, 곰팡이로 뒤덮인 책상을 걸레질로 닦아내는 등 애교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시련이 다시 찾아왔다. 1995년 6월 29일, 이준 이사장이 경영하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였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우리 학원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사장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면서 이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혼란이 온 것이다. 그간 이준 이사장은 종전의 재단과는 판이하게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재정의 투명성과 인사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학교 운영을 학교장에게 위임하여 자율성을 극대화시키고 책임을 강조했다. 또 연말과 연초에 위로회와 신년하례식을 열어 구성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전 교직원들의 수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원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정을 찾고 있을 때 갑작스런 이사장의 사퇴는 학원을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요인이 되었다.  

  법인은 신앙이 깊고 덕망이 높은 최창근 이사를 이사장으로 선출했으나 과도기의 대행체제로 인식되면서 예상했던 대로 대학은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교수와 학생들은 제각기 불만을 쏟아내고 각종 요구사항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장단기 발전계획, 부족한 교육 시설의 확충, 학원의 민주화 등 학생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연이어 북과 징을 울리며 교내 집회를 개최하고 급기야는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치 학원은 폭풍의 바다를 표류하는 배와 같은 형국이 되어갔다. 나는 이와 같은 과격한 행동들이 동일 구내에서 공부하는 중․고등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차단하며 혹 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오랜 고심 끝에 숭의이사회는 1999년 3월 19일, 백성학 이사를 명실상부한 이사장으로 추대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새로 추대된 백성학 이사장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백성학 이사장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혼란의 종식을 의미하며, 숭의가 위대한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출발이기도 했다.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숭의음악당을 개수하고, 부족한 교육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구락부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방동에 토지를 구입하여 중․고등학교를 이전하였다. 이것은 숭의 역사를 다시 쓰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협소한 교육공간을 해결하는 것은 숭의인 모두의 염원이요, 숭의 교욱 발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남산의 기존 건물은 리모델링하여 대학이 사용하도록 했고, 초등학교도 교육환경이 좋은 지상으로 새롭게 배치하는 등 놀랄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성서에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필요한 시련을 주신다고 하셨다. 시련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하는 회초리의 역할도 하지만,  새로운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섭리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위한 연단의 기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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