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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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동창회지 <빛보라> 간행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동창회지 <빛보라> 간행


                      
                       
                            * 기독교 공원묘원 이신덕 선생님의 묘비, 비문은 내가 쓴 것이다. *



   2003년은 숭의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숭의는 구한말 개화기에 시대적 요청과 선교를 목적으로 사무엘 마펫( Samuel. A. Moffett : 한국명 마포삼열)에 의해 평양에서 세워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33)”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여 ‘의(義)를 숭상하는 학교’라는 교명으로 출발했다.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민족이 수난을 당할 때에는 뜻있는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황국식민화 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여 폐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해방 후  모교를 사랑하는 동창들은 공산화된 자리에서 학교를 세울 수 없게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기도로 준비하고 힘을 모아 서울 남산 중턱에 모교를 재건하고 유능한 여성교육의 산실로서 발전을 거듭하며 100년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숭의와 호흡을 함께 해온 나는 100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서 무언가 뜻 깊은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학교는 기독교 실업인인 백성학 회장이 숭의학원 이사장을 맡아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숙원사업인 협소한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방동에 부지를 구입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를 신축하게 되어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나는 교육의 열매는 결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졸업생’이라는 판단 아래 졸업생과 관련되는 두 가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학교와 동창회 관계자를 모으고 본격적인 협의 들어갔다. 협의 끝에 서울에서 숭의를 재건할 당시부터 20여년간 모교의 교장을 맡아 학교를 발전시킨 이신덕 교장의 이름을 따서 기념장학회를 발족하는 것과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며 배출한 동창들의 업적과 삶의 모습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100주년 기념 동문지를 발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야심 찬 사업은 지난 100년의 숭의 역사를 정리하고 아울러 새로운 역사를 조명하는 일이며, 동창회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신덕 교장은 평양시절 숭의여학교 제19회(1924~1928) 및 보육과 3회(1930년 졸업)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한  주역이며, 모교 숭의여중고 제5대 교장으로 재직하며 숭의의 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분이었다. 그는 재학 중 학생면려회 회장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왜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치렀던 항일 투사이기도 했다. 졸업 후 원산 춘산유치원 교사,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 교사와 사감을 거쳐 1946년 서울에 숭의재건위원회가 발족된 후부터는 모교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고, 1950년 4월 숭의가 재건되면서 교감으로서 온갖 실무를 맡았다,

  드디어 1953년 숭의여자중고등학교가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혈육도 없이 단신 월남한 그는 당시 국무위원이었던 선배 박현숙의 지원을 받아 맨 주먹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에게 교사를 신축하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는 영욕의 세월을 항상 눈물로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으로 학교를 경영했다. 심혈을 기울인 덕분으로 학교가 번창하자 그는 과감히 숭의보육전문학교(숭의여자대학의 전신)과 숭의초등학교, 유치원을 잇달아 설립했다.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1971년 정부는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무리하게 확장하는 과정에서 1974년 재정 위기를 맞아 부도의 책임을 지고 애지중지 키운 숭의를 떠나게 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숭의는 떠났지만 그는 1994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송죽원(松竹園) 원장으로서 부모 없는 불우한 어린이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숭의학원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학원장(學園葬)의 예를 갖추었고, 숭의여자고등학교는 해마다 10월 중에 숭의 재건에 공로가 있는 박현숙 선생과 함께 ‘숭의의 어머니’로 추모에배를 드리고 있다.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교육자요, 숭의 재건의 밀알이었다.          

   나는 먼저 숭의 재건의 밀알로 살았던 이신덕 교장 기념장학회를 발족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그분의 생전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모교의 인재를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분과 의론하여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학교의 전현직 교장과 동창회 대표들로 발기인을 구성하고, 규약의 초안을 제정하고, 1999년 6월 30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창립총회는 예배에 이어 경과보고, 격려사, 규약 통과, 임원선거, 임원에 대한 위촉장 수여, 기금 마련 및 운영방안 등을 토의했다.

  이로써 <이신덕 교장 기념장학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고, 이 사업은 고등학교가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교장인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한동윤 목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에 의거하여 “이신덕 교장은 숭의의 어머니로서 그 분을 기념하여 장학사업을 벌이는 것은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새로운 인재를 키우는 의미 있는 일”임을 강조했다.  

  이신덕기념장학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자 이신덕 교장의 사랑을 받으며 교육을 함께 했던 중고등학교 전현직 교장과 교감, 평양동창회, 재건동창회, 동문합창단과 그 임원들이 기금 모금에 적극 참여했고, 재직동문을 포함한 각계의 동문들이 적극 가담해 주었다. 또한 숭의학원 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던 장학금과 이신덕 교장의 유품을 처분한 1천 5백여만 원도 장학회 기금으로 보태졌다. 그리고 미국 남가주숭의동문회에서도 모금 운동이 일어나 상당한 모금액이 자체적으로 모아졌다. 여기에 기념장학회가 설립되기 전 모교 교사로 재직하다 1997년 퇴직한 김경자 선생이 장학 기금으로 동창회에 쾌척한 기금 5백만원이 기념장학회 기금의 종자돈이 되었음을 물론이다.

  또 하나는 100주년 기념 동문지를 간행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100년의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에 걸맞은 일이요, 이로 하여 동창회의 위상을 높이고, 동창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하여 앞으로 동창회 활동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그 동안 열심히 활동해온 평양동창회, 재건 이후의 재건숭의동창회, 숭의동창회와는 별개로 자생적으로 모인 숭의동문합창단, 숭의어머니농구단, 숭의어머니배구단 등의 활동을 정리하고, 또 해외에서 LA를 중심으로 조직된 남가주 숭의동문회,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 숭의동문회 등이 활약상도 밝히기로 했다.

  또 그간 각 부문에서 훌륭한 업적들을 쌓아가고 있는 동창들을 발굴하여 빛나는 활동상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한 역사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암울한 시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목숨 걸고 싸웠던 평양 동창의 업적은 세월과 함께 인멸되기 전에 발굴 기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일이었다. 그리고 학창시절의 추억담을 한데 모으는 것 또한 귀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동창회이어야 하고, 동창회가 주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동창회에서는 사업을 결정 해놓고 역부족을 호소해 왔다. 이 일을 해낼만한 인원의 확보, 원고 청탁, 경비 조달 등 모든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전담할 수 있는 상근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만드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견을 처음 내놓았던 나는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와주기로 쾌히 승낙하고 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학교의 업무를 진행하면서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더구나 100주년 기념식까지는 불과 2년, 도와준다 하더라도 내가 퇴직하기 전에 책이 나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나는 즉시 동창회와 모교 재직 동창들을 모와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곧바로 이 일에 착수했다.

  재직동창인 황신덕 선생(75년졸)은 원고 청탁을 위해 동창들의 정확한 주소와 전화번호를 확인하게 하고 김명희 선생(78년졸)은 편집 및 교정을, 광고 협찬은 권명순 행정실장(70년졸)과 마당발인 박승숙(75년졸)이 발 벗고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전체 기획과 원고청탁은 내가 손수 맡기로 했다. 원고는 청탁에서부터 기일 내에 접수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어서 책임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는 먼저 동문지의 명칭을 <빛보라>로 정했다. ‘빛보라’는 ‘퍼져나가는 햇살, 곧 광채’라는 뜻의 순우리말로 어감도 좋을 뿐더러 세상을 향해서 빛을 비춰온 동창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채택되었다. 거기다 이 ‘빛보라’라는 이름은 매년 숭의여고 졸업식 순서지 표지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이사야 60장 1절)라는 말씀을 졸업생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삼아왔기 때문에 그것과도 잘 부합되었다.

  우선 나는 동문지 <빛보라>의 주요내용으로 평양 시절 동문들의 활약상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평양숭의 부문을 인물열전으로 꾸미기로 했다. 애국의 횃불 김경희, YWCA의 선구자 이효덕, 숭의 재건의 어머니 박현숙, 교육계의 여걸 황신덕, 최초의 여배우 겸 가수 윤심덕, 건국 표창을 받은 구순화,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항일투쟁의 선봉 한선부, 민족복음화에 헌신한 허경신, 한국 여류문학의 샛별 강경애, 숭의 재건의 밀알 이신덕, 최초의 여성 문교부장관 김옥길, 한국의 헬렌켈러 양정신 등 인물 열전의 대상자들은 모두 숭의가 낳은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숭의인물열전’ 코너를 만들기로 하고, 이 글은 이미 <숭의90년사> 집필을 맡았던 김종기 교감님이 정리해 놓은 자료를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의례적인 발간사, 격려사, 축사 등을 제외하고 책의 내용을 ‘회고와 전망’ ‘칼럼’ ‘선교사역’ ‘성공의 길’ ‘나의 학창 시절’ ‘후배들에게 주는 글’ ‘신앙간증’ ‘우리는 동문’ ‘잊을 수 없는 선생님’ ‘삶의 현장에서’ ‘해외 동창회에서 온 편지’ ‘해외거주 동문 코너’ ‘동아리 순례’ ‘특별대담’ 등으로 정하고, 원고를 청탁할 대상을 물색했다.

  이에 따른 원고는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사회를 이끌고 있는 대학교수(교사), 학자, 판사, 성직자(선교사), 군인, 경영인, 의사, 기자, 성악가, 시인, 화가, 디자이너, 탤런트, 농구인, 배구인, 방송인(성우 포함), 무용가, 여행가 등 국내외 92명 동문들의 글로 채웠다. 또 표지 디자인과 100주년 기념로고는 디자인을 전공한 전혜영(75년 졸)이 맡았다.

  이렇듯 100여명의 수고로 49배판 크기의 아트지 336면으로 제작된 동문회지 <빛보라>는 숭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은 체재나 편집 내용에 있어서 남녀를 포함하여 그 어느 동문회가 내놓은 것보다 출중한 것으로, 언제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책이 되었다.  

  2002년 6월, 숭의동문회는 숭의체육관에서 동문지 <빛보라 출판기념회>를 겸하여 <숭의동문의 밤>을 개최했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동문들은  TV탤런트 김미숙(78년졸)과 KBS기상캐스터 이익선(87년졸)의 진행에 따라 동문지 출간을 기뻐하고 축하했다. 그리고 동문지 발행에 심혈을 기울인 유공자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내년에 맞이할 개교 100년에 한발 앞서서 열린 이 모임은 마치 개교 100주년 기념식의 전야제와도 같았다.  



  
           * 숭의동문지는 숭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숭의 동문회에서 발행한 것이다. 표지 디자인 전혜영(75년 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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