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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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50대, 늦깎기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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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늦깎기로 등단



  고등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이 열리면 나는 시를 쓰거나 수필을 쓰거나 항상 입상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앞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에 입학할 때 국어국문학과를 지망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는 어떤 분야를 전공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크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이수해야 하는 교과과정은 크게 국어학과 국문학으로 나뉘고, 그것도 여러 학문분야로 갈라져 있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국문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장르별로 이수과목이 잡다해서 대학의 공부는 여러 분야에 걸쳐 골고루 공부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고, 학점 따기에 바쁜 나머지 나름대로 전공을 정해놓고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내 글재주(창작 능력)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 중에는 이미 고등학교 때 학원문학상 등을 통하여 당선된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하면 나의 창작능력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만 주눅이 들게 되었다. 그런데다 속칭 ‘글쟁이는 배가 고프다’라는 의식이 있어서 선뜻 창작 분야에 올인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대부분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지만) 학과공부를 하면서 교직과목을 이수하여 앞으로 국어교사가 되겠다는 현실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이 밉기도 하여 자신을 심히 질책하기도 했다. 그것은 창작분야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다른 탈출구라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었다. 일종의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이런 고민과 갈등을 겪던 차에 나는 창작된 작품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하는 비평분야나 이론적, 학문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비평(평론) 분야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대학재학 시절 두 차례 신진논문 현상공모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과 당선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 때 내가 가진 앞으로의 포부는 훌륭한 평론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도 군생활 3년에 이어 교사의 길로 접어들면서 결국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교육자로서 출발한 나는 평론가가 되기 위한 노력보다는 교육의 길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비교적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은 나는 교사가 되어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라고 다짐했고, 뒤돌아볼 여유나 이것저것 주변을 기웃거릴 틈이 없었다. 중학교에서의 3년을 빼고 고등학교에서 일한 대부분의 시간은 학생들의 대학입시 준비를 돕는 일이었고, 그 일은 곧 장래의 유능한 인재를 키운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나의 목표는 담당과목인 국어교과에서 아이들의 지적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것이었고, 대학 진학에 기여하는 것이었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윗분들의 눈에 들었던지 나는 고등학교 교감을 거쳐 1987년 중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학교에 부임한 지 3년째 되는 해(1971)년 봄, 황패강(黃浿江), 박찬일(朴贊一)김희경(金禧慶), 김희보, 홍치모, 김종기, 이창훈, 김성배, 장혜원, 장덕수(張德守) 등과 더불어 『기원(紀元』동인으로 참여하여 약 3년간 문예계간지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며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한 동안 평론의 끈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때 내가 주로 다룬 내용은 기독교 문학에 관한 것이었고, 윤동주, 박두진, 김동리 등의 기독교적인 작품을 다룬 것이었다. 그러나 재정난에 의해 폐간되면서 이마저 결국 지속되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습관이 된 나는 몇 년 동안 중학교 행정책임자로서 분위기를 쇄신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등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중학교 교장의 업무는 고등학교 교감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담이 적고 수월한 편이었다. 1994년 어느 초여름 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 교장실에 앉아 교육 잡지와 신문들을 읽고 있었다. 마침 『크리스챤신문사』에서 창간 34주년 신인문예상 작품을 공모한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또 월간 『교육평론』사에서도 신인상 문학작품을 모집한다는 광고도 보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내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문단 등단에의 염원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아니, 등단보다는 내 시창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 동안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놓은 습작 노트가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습작 노트를 꺼내어 손질하여 고쳐 쓰고 다듬어 우송했다.
              
  그 뒤 나는 한동안 원고를 보낸 사실조차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 당선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크리스챤신문사』에서 내 작품 <당신의 불꽃 속에>가 시부문에 최우수상으로 당선되었다며 당선소감을 써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심사를 맡은 황금찬 시인은 응모된 많은 작품 중에서 최우수상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하여 “아주 우수한 작품이다. 사상을 형상화하는 기법이 정교하고 묘하다, 절대한 신앙의 파도를 말없이 잠재우는 비유법이 눈에 크게 돋보인다.”(크리스쳔신문 1815호, 1994. 7. 9)고 했다. 당선 작품은 다음과 같다.


                          나의 슬픔이
                          당신의 불꽃 속에 재가 될 때
                          나는 자유를 얻는다.

                          나 홀로 살아있다는 것은
                          헤어날 길 없는 속박이 되고
                          아픔이 되고

                          나는 꽃 한 송이
                          피울 수 없는
                          타다가 꺼진
                          마른 부지깽이

                          그래도 당신을 위하여
                          영혼의 뜨락에 불을 지피며
                          한 줌 연기로 피었다 지고 픈
                          나의 생애여

                          당신의 불꽃 속에
                          마지막 육신의 옷을 벗는 날
                          나는 비로소
                          당신의 그림자로 다시 태어난다.  



  이 작품은 내가 지닌 신앙의 일단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절대의 신 앞에서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나는 죄인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야말로 꽃 한 송이 피울 수 없는, 타다가 꺼진 마른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을 향한 염원의 불을 지펴 연기로 피어오르는 날 나는 신의 품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을 믿는다는 어쩌면 단순한 내용이다. 그래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당신의 불꽃 속에>는 사실 나의 등단 작품이 된 셈이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낭보가 찾아들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교육평론』사에서도 시부문 신인상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총 응모작품 118편중에서 예선에 올라온 10명의 작품을 놓고 고심 끝에 내 작품 <대숲의 나무들은>외 1편 <빛의 작업>을 당선작으로 뽑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시 쓰기를 중단한 것도 오래되었거니와 요즘 문단을 노크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시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의외였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서로 모여 사는 대숲의 나무들은
                          잠 못 이루는 늦은 시간에도
                          손을 부비며 다만 서성거릴 뿐
                          결코 눕지 않는다.
                          아무도 잠 깨어 슬퍼하지 않는 밤
                          톱날 같은 바람이 우르르
                          여기저기 몰려다닐 때
                          숨소리를 죽이며 떨다가도
                          잠든 뿌리를 깨우며 일제히 일어서서
                          제 살을 깎아 창(槍)을 세운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시린 달빛에 번쩍이는 생명(生命)의 절규
                          큰 바람 일어 잡목(雜木)들이 눕고
                          가까운 이웃 울며 떠나는 날에도
                          푸른 하늘 밝은 햇살 사랑이 그리운 나무들은
                          등(燈) 내달아 길 밝히고 칠흑을 밤을 파수한다.
                          가파른 언덕을 땀 흘리며 오르는
                          나의 사람아, 그래도 하늘을 보자
                          설레이는 별들, 물 오른 눈을 뜨면
                          대숲의 나무들은 새벽안개를 걷어내고
                          기적(奇蹟)을 기다리는 빛나는 눈동자로
                          영롱한 아침 무지개를 세우리라.



  이 작품에서 나는 ‘대숲의 나무들’ 즉 꼬장꼬장한 대나무를 내세워 부정과 불법이 판을 치고, 온갖 사회악이 난무하는 혼탁한 사회, 사치와 향락으로 물든 타락한 현실 속에서 순수가치(純粹價値)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그것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과, 또 그러한 노력이 언젠가는 결국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이며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 대하여 본선 심사를 맡은 신세훈(申世薰) 시인은 심사평에서 “이들 당선작은 기성 신인급 수준에 육박하는 작품으로 선명한 시적 이미지, 적절한 시어의 선택, 자연 현상에 대한 심미적 관조의 자세 등이 돋보였다.”고 밝혔다. 나는 연거푸 통보된 당선 소식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뒤늦게라도 재능의 일단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1994년 여름은 신인으로서 문단을 노크하는 의미 깊은 해가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자랑을 삼고자 함도 아니고, 명예를 얻고자 함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문학에의 꿈을 실현해 보고자 함이요,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디쯤인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 내 작품을 지켜본 선배 시인이 문예계간지『문학과 의식』을 소개하며 수록할 작품 몇 편 요청했다. 나는 그것이 문단 등재를 위한 통과의례로 추천할 작품인지도 모르고 <숲에 비가 내린다>외 4편(난을 보며 / 그리움의 길목에서 / 서귀포의 봄 / 겨울 설악에 와서)의 작품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은 문예계간지 『문학과 의식』의 1997년 여름호(통권 37호)에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품으로 선정, 발표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로써 나는 시인으로서 이름이 문단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던 것이다.  

  나는 늦깎기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50대에 들어서서 이루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창작에 몰두『가장 낮은목소리로』(1990. 1, 목양사)를 시작으로 『하늘을 꿈꾸는 새』(1991. 11, 목양사), 『비상연습』(1994. 10, 진흥), 『저만치 그리움이 보이네』(2000. 11, 뿌리), 『그리움 불꽃이 되어』(2002. 7, 진흥) 등 모두 5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나는 그제서야 대학시절 시론(詩論)을 강의하셨던 조지훈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시는 진실한 생각, 진실한 느낌, 진실한 표현을 통하여 나오는 그 자신의 전인격적 체험에서만 스스로 체득할 수 있다. … 너는 시인에게 시작법을 묻기 전에 네 자신이 시에 대하여 치열함이 있는가를 먼저 반성해야 될 것이다.” 라고. 스승의 이 말씀은 시는 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한편의 시를 쓰더라도 전 인격적 체험으로만 체득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 다시말하면 치열한 창조적 열정이 없는 한 생명의 결정(結晶)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좌우명처럼 내게 일깨우는 말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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