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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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비움과 떠남의 미학(美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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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움과 떠남의 미학(美學)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인 시인 이형기 씨는 <낙화>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라고 노래했다.  가야 하는 낙화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구차함도 요사스러운 집착도 없다. 제때에 떠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다. 이 시는 집착 없음과 아름다운 물러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깨끗한 이별의 아름다움, 이 얼마나 멋있는 인생인가.

  ‘떠남’은 ‘머무름’의 생대적인 언어다. 인간은 원래 머무름과 안주의 속성이 강하다,  오랜 동안 터 닦아 익숙해진 곳을 털고 떠나기란 쉽지 않다. 머무름이 주는 안일과 달콤함을 뿌리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모세가 애굽 궁중 생활의 부와 명예를 미련 없이 버리고, 출애굽하여 민족을 이끌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찌를 듯 모세를 원망했다. 그러나 모세는 떠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미래, 인생의 참된 행복은 안주와 축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포기할 때 찾아온다. 풍족한 시절을 보내며 안일과 탐욕, 방종에 젖었던 과거를 성찰하고 삶의 설계도를 새롭게 짜는 것이야말로 차원 높은 성장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안주하고 얽매이면 떠날 수 없고 결국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안일에 매몰되지 않는 것, 악습이나 구태와 결별하는 것, 과욕과 집착을 버리는 것,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 이런 것들은 떠남의 본질이다. 36년 교사의 길을 떠날 때 나는 집착을 버렸다. 교회에서 장로 시무를 끝낼 때도 그랬다. 그 자리에 남아서 당면한 일을 마무리하라는 요청도 과감히 뿌리쳤다. 올 때가 있고,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이 자연이나 세상사의 이치다. 세상 모든 것들은 어딘가로 향하여 가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따라 일체의 존재들은 쉼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세월은 흘러가고, 시대는 변하며, 인물들은 교체된다. 꽃과 낙엽이 지는 것도 가는 것이요, 사람이 늙어 죽는 것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존재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은 '간다'는 말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고, 일체 만물에 관한 한 그 이상의 참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이 '간다'는 우주의 철리를 거역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월은 가고 있고, 사람들 또한 세월을 따라 쉼 없이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수많은 가고 옴, 헤어짐과 만남,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한다. 즉,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작한 것은 끝이 나야 한다. 이렇게 사람은 가고 떠나며, 헤어지는 관계의 반복 속에 일생을 보내고 마침내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거치는 것이다. 이 진리 앞에서 현명한 사람은 미련과 집착을 버릴 줄 안다. 미련과 집착은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그렇다.  나는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여 인생이 추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을 비우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 나아가 ‘떠날 준비’와 ‘가벼워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저녁으로
           짐을 정리하면서
           버리는 연습을 한다

           낡은 옷가지와 신발, 사진과 때 묻은 수첩까지
           한 가지씩 버리면서버리면서
           가벼워지는 연습을 한다

           가벼워지면서 나는 깨닫는다.
           더 가지고 싶어 허둥대던 지난 일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허둥대면서 상처로 남긴
           삶의 자국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버림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지금
           마지막 허망함과 부끄러움마저도
           버리고, 또 버리면서
           홀가분한 몸으로
           나의 구겨진 일상(日常)을 다림질한다

           그리고
           먼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오직 가벼운 영혼(靈魂) 하나
           소중히 챙긴다.



  <가벼워지는 연습> 전문이다. ‘버림’의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비움’을 위한 것이다. 세상의 욕망과 그것 때문에 얻은 수많은 상처들, 그것들이 모두 허망하고 부질없음을 깨닫아 아낌없이 털어버릴 수 있을 때 마음은 비워지는 것이다. 평생 애써 모은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도 비움의 미학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에 가까워온 사람은 인생의 후반전에 법어 들면서 가야할 준비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가벼운 영혼 하나 챙기고’ 먼 여행을 떠날 준비한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의 여행을 끝내고 또 다른 차원의 출발을 준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어느 길손에게
           잃어버린 노래를 물으랴
           투명한 세월의 유리창 너머
           종(鐘) 울고 해 기울어
           나 길 떠날 채비 이제야 하느니

           우거진 숲 속 나무 잎새들
           빗기는 노을 속에 아련히 잠기고
           휘파람 불던 사랑도
           빈 복도에서 점점 멀어질 때

           삶은 가끔 눈물겨웠어도
           그것은 아름다웠노라 여기며
           저 낙조의 황홀함까지
           그것은 사랑이었노라 속삭이며

           빈손일지언정
           평화롭게 잠기는
           노을 벗 삼아
           이제는 떠나야 하리.

           쓸쓸해도 자유로운
           그 고요한 웃음으로

                                                            - 졸고 <떠나야 할 시간>의 일부


           나는 가리라
           겨울 긴 잠 속으로 가리라
           눈 덮인 산허리의 달빛
           푸른빛으로 흘러내릴 때
           멀리 보이는 항구의 불빛이
           어둠에 잠기누나

           늘 아슬아슬한 세상
           지상의 거만한 삶이 버텨 선 계곡
           가파른 길 숨 가쁘게 올라온
           내 여정은 끝이 나는가.  

           작은 등불 하나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는
           겨울밤,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그리움으로 부를 수 있는
           불빛 하나 걸어놓고

           시린 무릎 감싸 안고
           나지막이 그대 이름 부르며
           이 밤, 나는 가리라
           겨울 긴 잠 속으로.

                                                            - 졸고 <겨울 긴 잠 속으로>의 전문

  
        
  앞에서 나는 ‘떠남은 또 다른 차원의 출발’이라고 했다. ‘간다’ ‘떠난다’는 최종적 의미는 죽음 죽음인 것이다. 삶이 있는 존재는 누구나 운명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이요, 실상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된 진행형일 뿐 둘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그림자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에 대한 커다란 질문으로 “인생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 인생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 의 세 가지를 물을 때, 이 질문의 답으로 앞의 두 가지 물음에는 답이 불가능하나 마지막 질문에만은 대답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답은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이처럼 분명한 길로 가고 있기에 이 엄숙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으나 이를 피하고 늦추기 위하여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6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가인 몽떼뉴는 일찍이 그의 수상록에서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를 해방한다”고 했다. 때가 되면 아쉬움과 두려움 없이 맞이해야 할 것이 죽음이며, 결코 죽음 앞에 비겁하거나 추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 울며 태어났다가 마지막 죽을 때는 다른 사람을 울리고 죽는다. 태어날 때 사람들은 많은 준비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축복 속에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도, 결혼을 하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런데 유독 죽음 준비는 별로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도 준비해야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올바르고 굳은 사생관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사라지는 모습이 진정 아름다운 건
           불붙는 바다, 그 낙조 속으로
           한평생 당신을 향한 젖은 눈으로
           그리움 찾아 유유히 살아지는
           배 한 척, 그 돛대 위에 빛날
           내일의 깃발이 있기 때문이다.


  
  <떠남의 미학>이란 글의 일부이다. 나는 강화 석모도의 토담마을 앞에서 작은 어선 돛대 위로 스러져가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면서 문득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꿈꾸는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여기는 순간, 죽음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면 / 먼저 떠난 이들의 이름 부르며/ 지는 해의 아름다움처럼 / 당신 손안에 / 아주 깊이 / 잠들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만큼 죽음 앞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Comments
김원호  (2014.09.18-06:28:44)  X 
빛이 어둠을 몰아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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