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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현옥(趙顯玉) 권사님의 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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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현옥 권사님(가운데), 우측은 임영수 목사님 *



조현옥(趙顯玉) 권사님의 아름다운 삶



   “이제 다 정리하고 내려갑니다. 고마웠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살던 아파트의 세간을 사위가 다 정리해 줘서 이제 홀가분한 몸으로 제주도로 내려간다는 전갈이었다. 조 권사님은 아들이 시작한 사업이 사기를 당하여 부도가 나게 되자 급전이 필요하게 된 것을 알고 아들을 위하여 살던 아파트마저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평생을 지니고 살던 가구들을 정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 가구는 고가의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평생 자식처럼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하여 손때가 묻은 것들이었다. 자리를 차지하는 소파, 식탁, 침대, 자개장, 장식장, 책장들은 갈 곳이 없었다. 어디 보관하자니 마땅한 장소도 없고, 보관한다 하더라도 그 가구들을 꺼내어 사용한다는 것은 기약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중고품상에 매각한다 해도 고물 취급을 받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남 교장님, 낡았지만 괜찮으시다면 그냥 갖다 쓰세요”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따로 사는 아들은 못난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며 두문불출이고, 노구에 발목마저 다쳐 거동이 불편한 권사님 홀로 뒷정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가구를 보관할 장소를 알아보고 중고품전문매매업소를 인터넷을 뒤져 확인하고 권사님 댁으로 달려갔다. 이미 한쪽에는 짐을 꾸려 쌓아놓은 것들이 보였다. 몽골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는 아들에게 보낼 헌 의복과 서적이라고 했다. 중량으로 보아 운송료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구들은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권사님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사장님과 함께 평생 살면서 정든 세간이라면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아들이나 딸이 애착을 가지고 사용하거나 보관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권사님은 그날 ‘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며 이사장님이 즐겨 쓰시던 모자와 시계를 선물로 주셨다. 사양하는데도 한사코 손에 들려주신 것이다. 나는 목이 메어왔다.      
          
  돌이켜 보면 권사님은 정이 많은 분이셨다.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나는 권사님이 살아오신 내력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몇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조 권사님을 알기 시작한 것은 1986년 11월 이준(李樽) 삼풍 회장님이 숭의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였다. 이준 회장님은 학원이 재정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숭의에 애정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앞장섰던 한경직 목사님의 간곡한 권유로 이사장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으나, 이사장의 내조자인 조 권사님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행사 때가 아니면 권사님은 학교에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훗날 한경직 목사의 술회에 의하면, 이준 이사장을 이사장으로 추천할 때 먼저 조현옥 권사님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만큼 조 권사님은 남에게 베풀기 좋아했고, 교회일이나 사업에서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내조했던 분이었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첫 해 이준 이사장은 매주 화요일 기관장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는 이사장을 비롯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의 기관장과 법인 사무국장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사장은 자신이 교육에 문외한이므로 각 기관장에게 자율권을 주고 교육, 인사, 회계를 책임질 것을 당부하면서, 매주 학사업무를 보고를 받고 현안 문제를 협의해 나갔다. 그런데 추석과 연말을 앞둔 회의 때는 수고했다며 양복 티켓을 선물로 주셨다. 선물은 해마다 한결같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내 돈 들여 양복을 맞춘 적이 없었다. 또 이사장은 연말이면 학원 내 전교직원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송년모임을 개최했다. 숭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280여명의 교직원들은 하얏트 호텔에 모여 1부 예배, 2부는 만찬과 함께 강연, 학교별 노래자랑, 빙고게임 등으로 기쁨을 함께 누렸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명절 선물과 송년모임은 모두 조 권사님의 생각을 이사장님이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양복점도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장애인이 사장으로 있는 곳이고 보면 남을 도우려는 권사님의 뜻이 더욱 돋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해가 되면 숭의 가족의 신년하례식을 거행했다. 하례식도 이준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신년 벽두 만나서 새해인사를 나누며 공동체 의식을 다지며 새 출발을 기약하기 위해서였다. 하례식을 마친 후에는 기관장들은 이사장님 댁에 모였다. 조 권사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조 권사님은 항상 웃음을 띤 인자한 얼굴로 대하셨고, 우리는 권사님이 손수 빚은 만둣국으로 점심을 대접받았다. 따끈한 만두 국물 속에는 권사님의 사랑과 정성이 짙게 녹아 있었다. 일하는 식구들이 있었지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가진 것이 많아 넉넉해서 하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기 쉬우나 진심으로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었다. 사업자의 아내요, 남편이 경영하는 학원 이사장의 아내이면서도 아랫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맡은 일에 정성을 쏟았다.

  이준 이사장 재임 동안 학원은 안정을 찾고 내실을 다져 나갔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며 성실게 일하자”라는 생활훈을 정하고 학원 내 각 학교간의 결집력과 공동체 의식을 높여 나갔다. 현상모집을 통하여 교표, 교기를 새로 정하고, 각 학교 디자인 표준화 규정을 제정하고, 학생들의 책걸상 교체, 학교 진입로 확장공사, 조경 공사 등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특히 취임 이듬해 7월 남산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자신이 경영하는 삼풍건설산업(주)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엄청난 피해를 단시일에 복구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95년 6월, 뜻하지 않게 이사장님이 경영하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대형재해가 발생되어 그 여파로 숭의학원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이사장은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이사장직을 물러났던 것이다.          
          
   10년 동안 이사장으로 모셨던 나는 그날 이후로 조 권사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사상자에 대한 배상 문제로 온갖 재산이 몰수되는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건강은 어떤지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가며 힘들게 살고 계시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5년 정도 지난 후 학교장들이 이준 이사장님을 면회하고 싶다는 말을 측근에게 전하여 서울교도소, 청주 교도소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나는 오랜만에 조 권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권사님은 그간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고, 우리의 손을 잡은 채 “면목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라며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을 돌보고, 남편과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의연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나는 당시 이준 이사장님 함께 기관장으로 일했던 정문섭 교장님, 염익동 교장님과 함께 가끔 조 권사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받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홀로 외롭게 지내실 조 권사님을 잠시라도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 준 이사장님이 법적 책임이 끝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 또 그 이듬해 돌아가신 후에도 네 사람의 만남은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조 권사님은 예약된 장소라면 미리 현장에 도착하여 식사 대금을 지불하셨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커피나 제과점 빵, 손수 빚은 만두, 어떤 때는 양말 몇 켤레라도 예쁜 포장지에 싸서 각각 나누어 주셨다.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다니! 처음에는 그런 권사님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권사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쉘 실버스타인(Sheldon Alan 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내놓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조 권사님은 아주 특별하신 분이었다.

  이제 조 권사님은 제주도에서 홀로 노후를 보내실 모양이다. 제주도는 친히 애착을 가지고 동양 최대의 식물원 여미지(如美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채 조용히 살아가실 것이다. 한번의 시련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하며 주님의 딸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마치 인간을 위하여 지위도 명예도 생명까지 내어놓으신 주님의 모습처럼 말이다.  

  오늘 겨울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나는 권사님을 생각하며 이준 이사장님의 유품인 털모자를 꺼내 써 보았다. 내 머리가 좀 큰 편이어서 모자는 꼭 끼었지만 그 어느 모자보다 따뜻했다. 일기 예보에는 오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눈보라가 친다고 했다. 오늘 따라 홀로 지내실 조 권사님이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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