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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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 박영희(朴英熙)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박영희(朴英熙)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병(病)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호(1923. 9) 수록


*<이해와 감상>

  슬픈 조국의 현실을 노래한 퇴폐적이며 감상적인 낭만시. 일찍이 회월은 이 작품을 가리켜 "현실에 대한 도피"라고 밝힌 바 있다.  즉 "현실을 떨쳐버린 순수화"라고 주장했다.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결같은 감상(感傷)이나 현실 도피 경향인 것이다.


◈ 작품 해설

  <박영희는 1920년대의 병적, 퇴폐적 낭만주의를 대표했던 <백조>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백조파의 문학을 우리는 흔히 몽환, 현실도피, 영탄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시인으로는 박종화, 홍사용, 박영희, 이상화, 김기진, 노자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회월 박영희의 시는 백조파의 현실도피적 영탄의 문학을 가장 대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1923년 <백조>에 발표된 박영희의 대표작이다.

  한없는 절망이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기울어갈 때, 미풍 같은 한숨은 갈 곳을 모르는 채 속절없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프롤로그로 시가 시작되고 있다. 아무런 희망이나 기쁨의 편린을 찾아볼 수 없는 칠흑의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어둠을 밝혀 주던 우리가 아름답게 보았던 '달'도 남몰래 병들어 갈 곳을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근심스럽게 걸어오는 달님이 검붉은 구름 속으로부터 나와서는 그 병든 얼굴의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나에게 흐를 때, 갈 곳을 모르는 나의 마음은 하염없이 그 달빛만을 그리워한다. 본래 아름답던 내 마음은 이때부터 병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의 안식처 곧 병실을 만들기 위하여 달빛을 모아 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채울 길 없는 공허한 나의 마음은 현실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깨달아야 했다. 병든 내가 안식처 곧 병실에서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죽게 되었을 때, 달님이 보냈다고 하면서 천상의 세 처녀가 나타난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고이고이 간직했던 순결한 사랑도 상처 투성이임을 발견한다. 이러한 상처의 자각은 시인의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민족적 처지일 수도 있다. 세 처녀의 이름은 상처받고 패배한 자가 가져야 되는 정서나 상태를 의미하는 '슬픔, 두려움, 안일'이었다. 이때부터 이것들은 영영 내가 고치지 못할 병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시인은 이 작품을 일러 '현실에 대한 도피'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으며 '현실을 떨쳐 버린 순수화'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환상과 몽환의 세계가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현실의 어떤 반영 곧 당시 민족적 조건이라는 시대정신의 소산이라면 그 의의는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1920년대 병적 낭만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실과 상처의 기록'이다.>

                                                                              - 윤경갑 外, <현대시 연구> 중에서 인용


*작가 박영희(朴英熙, 1901~ ?)는

호는 회월(懷月). 서울 출생.
배재고보 졸업. 1921년 <신청년>에 작품 발표. 같은 해에 <장미촌> 동인이 되었고, 시 <적(笛)의 비곡>등을 발표.
1922년 <백조>창간 때에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이상화, 현진건, 안석주, 노자영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가하여 탐미적인 낭만시를 많이 발표.
이후 <백조>가 붕괴되면서 1925년 8월, 카프에 가담, 팔봉 김기진과 함께 카프의 핵심적 지도 이론가 되었음.
1937년에 시집<회월시초>를 발간. 1950년 8월초에 남북된 것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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