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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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3)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3)



41. '광화문 용사' 이도윤

  시인들이 시만 쓰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이는 없을 것이다. 대개 직업을 갖고 있는데 시 쓰는 일과 관련 있기도 하지만 가끔 전혀 동떨어진 일을 하는 이들도 있다. PD인 이도윤 시인도 그런 예다.

  이 시인은 직업만 이색적인 것이 아니라 용모도 출중한 편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과는 달리 술을 마시면 울기도 잘하고 또 애교 섞인 주정도 많이 부렸다. 건강 문제로 의사가 강력하게 금주를 권했는데도 술을 끊지 않았다. 술을 마신 뒤에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 배호의 '누가 울어 ' '아직도 못 다한 사랑' 등을 자주 불렀다. 노래 솜씨가 하도 뛰어나서 '살아있는 배호' 로 통했다.

  이 시인이 탑골에 온 어느 날 너무 많이 술을 마셨다. 옆에는 이승철. 박영근. 이재무. 장대송 시인 등이 있었는데 그 날은 이 시인의 술주정을 차분히 받아주고 있었다. 물론 그들보다 이 시인이 나이가 조금이라도 위였지만 그날만은 관계가 역전된 것 같았다.

  "야, 그게 어디 니 잘못이냐. 어차피 터질 일이었고 너 또한 양심에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데 뭐가 속상하다고 울고 그래. 자 술이나 맘껏 마시자."
  "얌마 니들이 뭘 알아! 나 때문에 억울한 사람 목이 잘렸는데. 나도 먹고살기 위해서고 경찰도 먹고살기 위해선데. 나 때문에 억울하게 목이 잘려서야 될 일이냔 말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사연인 즉 이랬다. 당시 이 시인이 보도국 기자로 있으면서 고속도로에서 '삥땅'을 치는 경찰관들을 촬영해 보도함으로써 경찰관 서넛이 파면 당했는데 그중 한 명은 현장에 없었지만 같은 조라서 억울하게 파면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 경찰은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소송을 내고 이 시인을 증인으로 요청했다는 것. 그러나 방송국 관례상 증언을 하지 못해 서류상으로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만 그 일이 잘못돼 결국 그 경찰이 옷을 벗게 됐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일본 NHK TV에 그대로 보도되고 한국기자협회에서는 한국기자상을 준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방송국을 그만 둔다고 난리를 피운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뒤에 이 시인은 보도국에서 스포츠국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스포츠 쪽에서 PD로 일을 한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한없이 문약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정작 이 시인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광화문 용사'였다. 광화문 용사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거창한 시위나 독립투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87년 이후 정국이 한창 가파르게 대결구도로 가고 있을 때 이 시인이 광화문에서 누군가의 결혼식이 끝나고 선배 문인들과 함께 술을 마신 뒤의 일이다. 지금도 화장실 문제는 심각하지만 당시는 더했고 맥주를 마신 몸은 출렁대는 방광을 비워달라고 요란 법석을 떨었으니….

  이 시인은 결심했다고 한다.세상도 맘에 안 들고 그렇다고 그걸 못 참는 방광도 불쌍하고, 때는 일요일이라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으므로 얼마간의 호기와 저항의식으로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순신 장군상이 볼 수 있도록 물줄기를 쏘아댄 것이다.그러나 마른 모래에 몸을 감추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멀리 가기도 전에 달려온 경찰에 의해 그는 붙잡히게 됐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광화문 용사다.


42. 문인들의 대합실

  얼마 전 민주화를 위해 불처럼 태풍처럼 살다가 안타깝게 타계한 조태일 시인은 유신시절 밤마다 장독대에 서서 '유신독재 타도' 를 외치다가 당국에 혹심하게 당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장독대 사건' 이라 불렀다.

  이도윤 시인이 나름의 반항을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방뇨로 표현한 것을 '광화문 사건' 으로 부른 것도 이런 의식의 연장선상에서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웃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과 잘못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다소 우습게 표현된 바 없지 않지만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당시 시인들의 투박하고도 건강한 초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 보니 많은 지역문인들이 떠오른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큰 행사를 치를 때에는 지역의 문인들이 대거 서울에 왔다가 밤차를 타고 내려갔지만 떠나기 전에 탑골에 모여 서로 회포를 풀곤 했다.자연 각 지역 연락간사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부산지역은 최영철. 이적 시인, 마산.창원은 이소리 시인, 대구지역은 김용락 시인, 청주는 김희식. 김성장 시인, 대전은 이강산 시인, 전주는 박남준 혹은 박배엽 시인, 광주는 임동확 시인 등이었다.

  이들은 늘 지역의 중견. 중진 문인들을 모시고 왔다. 가령 광주의 이명한. 문병란 시인, 전주의 정양. 최형. 이광웅 시인, 부산의 임수생 시인, 창원의 이선관 시인, 밀양의 고(故) 이재금 시인, 대구의 이하석 시인, 청주의 도종환 시인, 속초의 이상국 시인, 울산의 김태수 시인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이들은 술좌석에서도 문학의 민주화라든가 지역문화운동 혹은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고민하곤 했다. 서로 성공담을 청해 들으며 때론 부러운 표정도 되고 때론 한탄하기도 했다. 탑골에서 서로 나누는 얘기를 귀동냥하다보면 이들이 없다면 전국적인 행사를 열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원들을 동원하고 행사의 내용을 채우고 또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이 가끔 데리고 온 지역 신인 문인들로 탑골의 술자리 또한 풋풋하게 전국 규모가 되어갔다. 지역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그야말로 활력이 넘쳤다. 청주의 김희식 시인이 부르는 판소리나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고, 김용락. 최영철. 유명선 시인 등의 트로트 등은 언제나 재미있었다.물론 이들은 피가 뜨거워 당시의 운동가를 많이 불렀고 가끔씩 싸움판도 벌였다.

  하지만 그 싸움들은 서로의 애정과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이었으므로 언제나 벅찬 감동으로 귀결되었다.한쪽에서 서로 언성을 높여 싸워도 그 옆에선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술판이라 여겼음직하다. 그런 때에 고 채광석 시인은 자신의 시에 즉흥적인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는데 그 곡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제 어떻게 올라갈지 아무도 몰랐고 언제 끝날지는 '며느리도 모를' 만큼 절묘했다. 큰 입 그리고 유난히 하얀 이가 감은 눈과 함께 이루어내는 괴상한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긴장시켰고 노래가 끝난 뒤에는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듣기에도 민망한 노래가 빨리 끝난 것이 적잖이 안심돼 치는 박수 같기도 했다. 또한 거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박영근 시인이나 키가 장대 같았던 강세환 시인이 휘청거리며 부르는 노래가 곁들여지면 한바탕의 난장이 벌어졌다.80년대 말 순정한 시대적 양심과 야성 넘치는 글들로 들불같이 일어났던 그 민중. 노동. 지역 문인들은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43. 문인들의 춤바람

  해 떨어지기 전부터 탑골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젊은 남자문인들이 선배 여류 소설가 이경자 씨와 몇 잔 마시며 속닥거리더니 일어났다. 일행은 허리우드 극장 부근의 한 카바레를 찾아갔다. 소설가 김영현. 김남일, 시인 강형철. 박영근. 이승철. 이재무. 박선욱. 이소리. 이원규 등을 이경자 씨가 이끌었다. 92년 연말 무렵이었다. 이들이 카바레를 가기 전에 간단한 교육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야 거기 가서 괜히 종업원들하고 싸우면 안 된다. 그리고 파트너가 정해지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거야. 너희들이 맨날 나라의 민주화니 민족의 통일이니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이 시대 마음 둘 곳 없는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와서 잠시 마음을 놓아두는 풍경을 보면서 깨우치는 것이 있어야 돼. 그 많은 주부들을 소외시켜 놓고 무슨 민주화냐. 그리고 설령 춤을 못 춰도 성의를 다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알았지."
  
  "추다가 약간 흥분되면 어떻게 하죠?" "염려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또 그렇게 야한 포즈를 취하면 퇴장 당해. 잘 들어.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고 민중들의 숨결을 배우러 가는 거야."   "너무 거창한 것 아닙니까. 춤은 춤이지."

  일행은 약간 어두운 카바레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입장료는 그날의 교사 이경자 씨가 냈다. 이 씨는 일하는 사람을 불러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일행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10여 명의 시인. 소설가들은 대기실에 죽 앉았다. 맨 먼저 플로어에 나간 것은 김영현.강형철 씨였다. 이승철 시인이 소리쳤다.

  "카바레에서도 선후배가 있나 뭐. 여봐 웨이터. 거 우리도 인간답게 춤 좀 춥시다." 나머지 사람도 웃으면서 웅성거렸다."잘 추고 오쇼. 빠꾸 맞지 말고."

  그 사이에 이경자 씨는 시범을 보이듯 한쪽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나머지 문인들도 마침내 플로어로 다 나가서 처음으로 '인간답게'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력한 보람도 없이 곧 이어 하나 둘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형철 시인이 말했다.

  "아아니 그럴 수가 있는 거야! '목포의 눈물'에 맞춰 도로똔지 도로프슨지 일절을 췄는데 손을 턱 놓아버리는 거야. 젊은 사람이면 내가 이해한다, 인간적으로. 하필이면 칠십은 다 된 것 같은 할마 씨가 그럴 수 있냔 말여."

  "야 그러니까 너도 기본 스텝은 익혀 둬야지. 그리고 너는 뭐 젊어 보이는 줄 아나본데, 너도 가서 거울 좀 봐라. 내가 할머니라도 너하곤 안 추겠다." "어허 내가 이래봬도…. "   그런 허튼 자부심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묻히고 멀리서 춤을 추는 일행의 선생의 스텝만 아름다워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야 나가자. 이거 창피스러워서. 당장 어디 가서 춤이라도 배워야지. " 하지만 일행은 춤을 배우러 가지도 못하고 대거 탑골로 몰려왔다.

  그래도 1절과 2절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자기의 파트너는 젊은 새댁 같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 "야 그렇다고 빨리 나오면 어떻게 해. 내가 말했잖아, 성의를 다해서 춤을 춰야 한다고. 아무리 손을 놓아도 애틋하게 애원을 했어야지. " 뒤늦게 돌아온 이경자 씨가 일행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44. 五松會와 이광웅

  소설집 '절반의 실패'를 펴낸 이후 페미니즘 문학의 중요 쟁점이 될 만한 문제작들을 계속 발표하던 소설가 이경자 씨는 젊은 문인들과 특히 잘 어울렸다. 인세가 나오거나 원고료를 받으면 젊은 문인들의 보양을 위해 개고기도 사고 '카바레의 춤'처럼 젊은 문인들의 모자란 부분을 거침없이 보완해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음담패설도 즐겨하는 편이었고 듣기도 매우 좋아했다.

  늘 강조한 것은 문학이나 문학운동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 문인들로부터 '인생파 누님' 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그는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을 곧잘 탑골로 소집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소설가 송기원. 박범신. 윤정모. 김성동. 윤명혜 씨, 시인 노영희.고(故) 고정희. 이시영 씨 등과 80년대 함께 어울려 '우리는 외로운 사십대' 라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아무튼 그날 젊은 문인들의 카바레 견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에게 약간의 세상연습을 시켜준 것은 '인생파 누님' 다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약간 에로틱한 인생파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인생파 시인' 도 있다. 바로 시인 이광웅 선생이다. 물론 이광웅 시인이 탑골에 온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전교조 행사를 마치고 왔거나 구속문인을 위한 문학의 밤 행사가 있을 때였는데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온 것도 잘 몰랐다.5공 시절 초반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차에다 두고 내린 일 때문에 수배 대상에 올랐고, 그 일로 진보적인 교사 다섯 명이 감옥에 간 사건이 '오송회'사건이다. 이광웅 시인은 그 조직의 '수괴'로 몰려 5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87년에 석방됐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대밭' 이란 옥중시집을 냈다.

  89년에는 '목숨을 걸고' 라는 시집도 냈다. 출옥 이후 문인들이 석방운동에 힘써준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또 감옥에서 만난 김남주 시인의 안부를 전하는 전령으로 가끔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했는데 늘 조용했다. 술도 조금밖에 못하는 편이었으나 미성으로 부르는 노래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해방 후 유행한 '부용산'은 물론 감옥에 있는 동안 미전향 장기수들로부터 배웠다는 일련의 노래는 나로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잔잔한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노래의 아름다움보다 노래를 끝낸 뒤의 이광웅 선생이 짓는 표정이 사람들을 더욱 감동하게 했다.추운 겨울 난로 가에 다가온 소년의 뺨처럼 해맑고도 붉은 모습이었는데 거기에 약간 부끄러움이 더해졌으니 우리 모두는 "저분은 천생의 시인이야" 라고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원양 어업이란 말보다 먼 바다 고기잡이가 더 좋은 것 아니냐"고,

  "개인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인민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뭐가 나쁘냐"며 취조하는 형사에게 대드는 통에 "이런 악질은 처음 본다"며 배후 세력을 찾아낼 때까지 물고문. 비행기고문. 통닭구이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고 한다.

  결국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배후밖에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었던 시인 이광웅. 그러나 그분도 돌아가셨다.92년 암으로 돌아가신 선생을 묻고 온 날 젊은 시인들은 탑골에서 또 한바탕 술을 마셨다.세상의 맑은 영혼들은 받아들이는 비극에 대한 감도가 더 예민하고 깊은 까닭에 몸에 침투한 병원균도 더 극악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잔잔하면서도 올곧기 짝이 없던 시인 한 명, 탑골의 어두침침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이즈음 세상이라는 넓은 광장에서 마음의 등불로 기억된다.


45. 탑골의 정객들

  탑골을 운영하는 동안 뜨내기손님들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문화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혀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일부 정치인들은 문화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김상현. 고(故) 이수인 의원, 손학규 의원과 5공 실세였던 허문도씨 등이 그런 분들이다. 마당발로 소문난 김상현 전의원은 민예총 관계자들과 많이 왔다. 김용태. 여운. 김정헌 화백이나 고은. 신경림. 구중서 선생 등과 같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상현 의원은 늘 술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끝날 때는 술값도 기분 좋게 계산해주는 멋쟁이였다.사실 나는 탑골에서 김 전의원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1년 정도 그의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는데도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눈썰미는 참으로 매섭다고 생각했다.손학규 의원은 1993년 보궐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자당 후보로 당선된 지 얼마 후 지구당 관계자들과 함께 탑골에 들렀는데 거의 자정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당시만 해도 '자정이후 영업금지'라 곤란했다. 어찌할까 망설였는데 손 의원과 친분이 있던 이시영 선생이 특청을 해서 술을 내놓았다. 손 의원은 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문인들 빽으로 술을 마시게 되어서 술맛이 더 좋다" 면서 매우 즐거워 했었다. 이수인 의원은 국회의원이 된 후 송기숙. 고은 선생 등과 어울려 탑골에 왔는데 술을 아주 즐겼다. 특히 송기숙 선생과는 형제처럼 어울려 인상적이었다. 대구출신이면서 호남에서 당선됐다는 특이한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지역문제를 초월해 우의를 보인 것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작고기사를 보면서 지역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제일 자주 온데다 강력한 인상을 남긴 이가 바로 허문도씨다. 5공 시절 '나는 새도 떨어Em린다'는 막강한 힘을 가졌던 분으로 알고 있는데, "탑골을 김지하 시인 때문에 알게 되었다" 며 가끔 와서 조용히 술을 마시곤 했다. 주로 방에서 술을 마셨는데 한번은 당시 작가회의 젊은 문인들과 맞닥뜨리는 바람에 적잖은 소란을 빚기도 했다. 5공 청문회가 끝난 한참 후였는데 젊은 문인들은 허씨를 알아보고 "탑골이 어딘데 저런 사람이 와서 술을 마시느냐" 고 항의를 했었다. 허문도씨와 관련돼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간 뒤 홀로 술을 마셨던 날이다.

  역사적 평가야 어떻든 본인이 모시던 분이 백담사에 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회한이랄까 비통함에 잔뜩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사인펜을 달라고 해서 벽에 '월인백담 만파정식(月印百潭 萬波停息)' 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글 아래에 을묘(乙卯)춘(春), 서림(徐林)이라는 서명도 함께. "오늘도 어김없이 떠오른 달은 백담사에 유폐된 주군을 비출 것인 바, 그 달빛을 받으며 주군이 느낄 만 가지 생각이나 비통함을 생각할 때 나 또한 천 갈래 만 갈래의 회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노라"는 뜻이라고 어떤 분이 해석해주었다.

  뒤에 오신 손님들은 그 글을 읽고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막강한 힘으로 만인 위에 군림하던 사람이 권력의 정상에서 비껴나자마자 백담사로 가고, 그를 따르던 이가 홀로 남아 연모하는 풍경이 '권력무상'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날 밤늦도록 통음하던 허문도씨의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46. 클래식 박사 송영희

  극적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에 전혀 빠지지 않는 사람이 희극 배우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같은 이야기인데도 어떤 사람이 말하면 재미가 하나도 없고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송영 선생은 탁월한 희극 배우다. 송 선생처럼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찬찬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웃기는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송 선생은 대개 시인 이영진. 강형철. 이승철. 이재무. 박선욱 등과 어울려 왔다.송 선생이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에는 작가들을 위한 기금마련 술집을 하고 그 뒤풀이를 탑골에서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송영 선생이 있는 자리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가 들어보려 해도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들어봤자 별 얘기도 아니었다. 본인의 자랑을 슬쩍 곁들이되 그것을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승철이 자네도 알다시피 콩트 이런 것은 내가 거의 천재 수준 아닌가.사람들이 콩트집도 내던데, 우리 집에는 콩트가 널려 있어.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라니까.  "에이 선생님도. 많긴 많습디다. 선생님 방에 가니까 각종 사보에 쓴 콩트가 방바닥에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으니까 그 말도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이 천재라고 하시기에는 조금…"

  말이 잘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굳이 반박할 것도 없을 만큼 말의 빈틈을 물고 늘어지는 솜씨에 사람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잔잔하면서도 조용한 분이 해병대 학사장교 탈영병 1호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7년을 도피생활을 했고 그 기간 동안 클래식 음악감상실에 출입하면서 전문가 수준이 됐다고 하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게다가 바둑의 수준이 김성동. 김흥규 선생과 더불어 한동안 '문단 3강(强)' 을 이루어 서로 본인이 최강이라고 주장했다. 엇비슷한 실력의 문인들은 서로 '하수' 라고 부르기 좋아해 졌을 때는 운이요, 이겼을 때는 실력이라고들 했다. 바둑에 관해서는 송영 선생도 똑 같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송영 선생이 부르는 '부용산' 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은 이 노래를 문단에서 처음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김지하 시인이 원조라는 설, 황석영 선생이 원조라는 설 등이 오가지만 송영 선생도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남북정상회담도 열렸고 하니 '부용산'의 작곡자를 알아내는 게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이 노래를 처음 부른 문단의 원조도 언젠가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이 노래는 해방 후부터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빨치산 활동에 가담한 사람의 애달픈 심사를 노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목포의 한 음악 교사가 사랑하는 연인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슬픔에서 만든 노래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이 노래가 유장한 가락에 실려 불릴 때는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다.

   "부용산 오릿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오릿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송영 선생은 노래만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나 감식력이 매우 빼어나 음악 전문지에 주요 연주에 대한 평을 연재했고, 이를 묶어 '무언의 로망스' 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잔잔한 노래가 듣고 싶다.


47. 별난 애정표현

  사람들이 왁자지껄 들어오고 있다.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문 쪽을 본다. 이가 잘 맞지 않는 탑골의 나무 대문의 위쪽에 달린 방울이 딸랑딸랑 울리며 낯익은 사람들이 서로 눈인사를 나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와 연인처럼 꼭 껴안는다. 그리고 한참동안 입을 맞춘다. 들어오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야, 송기원이한테 입술 뺏기지 않으려면 빨리 가서 조용히 앉아. " "입술만 뺏긴다면 그까짓 것, 천 번이면 어때, 혀가 뱀처럼 쑤우욱 들어오니까 문제지. " 그러나 송기원 시인의 입술을 피해갈 문인은 아무도 없다. 나이가 든 시인 신경림. 민영, 소설가 현기영 씨는 물론 비교적 젊은 편에 속했던 문학평론가 진형준. 임우기, 시인 김사인. 이재무. 이승철, 소설가 김남일. 방현석 등등. 모두 입맞춤을 피하지 못했다.

  여자문인은 안심해도 된다. 남자들 상대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만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뿐이다. 송기원 시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문인뿐이랴.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기를 못 떠나라우. / 썩은 몸뚱아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살붙이' 라는 시다. 너무나 많이 들어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늙은 창녀의 회한조 넋두리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한 시 속에 서려있는 사람에 대한 깊디깊은 사랑은 참으로 장엄하다. 인생의 맵고 짜고 쓰면서도 동시에 단맛이 이 시에 잘 익은 장아찌처럼 박혀있는 것 같다.자신의 몸을 세상이라는 장터에 내놓고 이리 저리 팔면서 겪었을 회한과 서러움이 얼마이랴. 하지만 이제 그 설움을 거둬들이고 인간들의 서러운 몸짓과 외로움을 이 여인은 본다.외로움을 애틋하게 여기다 못해 내가 그들의 살붙이는 아니었는지를 가늠해보는 마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달돼 아프도록 어여쁘다.

  탑골을 자주 찾는 많은 시인들을 보며 가끔 '위대하다' 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설움 저 설움 다 있어도 제 손톱 밑에 박혀있는 아픔이 제일로 크다고들 하지 않는가. 제 설움이나 슬픔이 힘겨워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런데 시인이란 참으로 독특한 이들이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내 언어로 수놓는다.

  이상한 일은 사랑도 아니 사랑의 표현형식도 전염된다는 것이다. 송기원 시인의 입맞춤은 문학평론가 진형준. 임우기씨에게 옮아가 한동안 그들도 다른 남자문인들의 기피대상이었다. 작지 않은 그 입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궁리하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그 사이 송기원 시인은 새로운 사랑형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볼태기 잔' 이라고도 하고 '입술잔' 이라고도 불렀는데, 먼저 맥주를 마신 송기원 시인이 다른 사람의 입술에 맥주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입 맞추는 것을 피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주는 더욱 진한 사랑. 따뜻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하며 찝찔하기도 한 그 잔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로 달려갔던가. 집요하고도 어두침침한 송기원 시인식 사랑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아름다운 악동'은 지금은 어디서 또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48. 확실한 단골 송기원

  탑골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오신 손님' 이라면 단연 송기원 선생이다. 단짝처럼 지내는 이시영 시인도 많이 왔지만 그래도 최후까지 남아서 술을 마시며 어울렸던 사람은 송 시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송 시인의 짓궂은 행동도 내겐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또 탑골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리 짓궂은 행동을 해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어 넘겼다.송 시인이 있는 자리엔 늘 긴장감 넘치는 재미가 마른 논에 송사리 모인 것처럼 오골오골했고 활력이 넘쳤다.

  언제였던가 정확하지는 않은데 아침나절에 이시영 시인과 김사인 시인이 들이닥쳤다. 늦은 밤엔 자주 왔지만 아침 일찍 온 것은 드문 일이어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이시영 시인은 "김사인 시인과 밤새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돼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앞에 미인이 걸어가 무심히 따라오다 보니 탑골이었다" 고 말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벽면에 송기원의 청자켓이 걸려 있어 "과연 송기원" 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고. 그 말에 나도 웃고 말았다. 새벽녘에 탑골에 온 송 시인이 홀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사우나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탁자에 걸쳐놓은 자켓을 종업원이 방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을 보고 이시영 시인이 반갑다고 말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송시인은 탑골에 오는 모든 문인들과 잘 어울렸지만 특히 원경스님이나 희곡을 쓰는 안종관  선생. 영화감독 장선우 씨 등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다른 문인들에겐 술값을 내는 등 뒷바라지를 했지만 이분들과 왔을 때는 원경스님이 뒷감당을 많이 했다.원경스님의 친부가 유명한 박헌영 선생이란 얘기를 한 잡지에서 본 일이 있는데 그런 사실들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민족의 동질성이 얘기되는 상황이므로 명확하게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스님은 나에게도 정말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탑골에 문인친구들과 함께 오신 스님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중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아닌가 한다. 참으로 큰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송 시인은 그렇게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겼다. 간혹은 잘 꼬집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일이 바로 '사봉잔 사건' 이다. 송 시인이 실천문학사를 운영할 때였는데 '접시꽃 당신' 이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여유 자금이 생겼다. 송 시인은 평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엔 노동문학을 지원하는 일도 들어있었다.

  송시인은 월간 '노동문학'을 내는 한편 지역이나 현장의 문예운동 모임을 지원했다. 시인 김윤태 씨가 '구로 노동자문학회' 실무일을 맡고 있을 때도 실천문학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그런데 언젠가 송 시인이 김 시인을 싫지 않게 혼내는 것을 보았다. 김 시인은 당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노동문학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선후배를 엄격히 가리고 특히 윗사람에 대해 극진한 예의를 갖췄다. 송 시인은 내심 좋아하면서도 김 씨가 표방하는 '과학적 문학운동'과 괴리가 있다고 생각해 은근히 꼬집고 싶었던 듯하다. 송 시인이 김 시인에게 "너야말로 사봉잔이야" 라고 명명한 이후 김윤태 씨의 별명이 사봉잔이 되었다. 사봉잔이란 '사회주의 봉건잔재' 라는 말의 약자다. 당시 많은 젊은 문인들이 지녔던 관념적 급진성을 적절히 지적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49. 가난한 시인의 유산

  조용히 왔다가 소리 없이 가는 술꾼 중에 한 사람이 고형렬 시인이다. 탑골에는 대개 늦은 시간이 돼야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로 오후 10시 이후에 오는 사람이 많아 오후 8시께면 손님을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간쯤에 고형렬 시인이 혼자 찾아왔다. 주로 여럿이 몰려올 때 같이 오던 시인이었으므로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기대를 훌쩍 지나쳤다. "집에 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너무 일찍 왔나. 하기사 매번 밤늦게 온 기억만 있어서‥.. "

  나는 그 밋밋한 대답에 웃음도 났고 왠지 정겨워지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조금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올 거에요. " 맥주 몇 병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이 생각 저 생각 떠올랐고 마치 선보는 사람처럼 머쓱해졌다가 불쑥 고향을 묻고 말았다. 고형렬 시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향은 전남 해남이었지만 나는 강원도 속초에서 나고 자랐지. 서울 오기 전에 면에서 일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서울이라는 데가 정이 안 붙어서 고생했는데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가. 복희는 어디야. " "저는 원래 서울이에요. 동대문구 창신동 산동네에서 나고 자랐지요 "

  말을 하고 보니 점차 우스워졌다. 여간해서 그렇게 다정하게 고향을 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면서 생긴 마음의 빈자리를 돌아보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점잖은 신사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故) 채광석 시인도 그런 경우다.

  채광석 시인은 1987년에 작고했다. 탑골의 문을 열 때부터 여럿과 함께 찾곤 하던 채 시인의 유난히 큰 입과 희디흰 치열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탑골에서 채 시인이 말도 많이 했고 노래도 많이 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크게 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함박웃음이었다. 그렇지만 채 시인은 내가 알기로 1987년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 부를 만큼 많은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채 시인은 문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인, 나아가 노동운동 곳곳에 많은 지인들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여 당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6.29선언이 나오고 사회가 민주화가 되어가는 모양을 갖춰가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운명의 그날도 아직은 선언에 불과한 6.29선언을 실질적인 민주화의 디딤돌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후배 문화인들과 밤늦도록 토론을 벌이다가 귀가하던 신새벽에 그 참변을 당했으니….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채 시인의 호주머니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문화인장으로 치러진 세브란스 병원에서 후배 시인이 오열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한 조사를 들으며 알았다.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다 바쳤지만 자기 가족을 위해선 아무런 유산이 없던 사람, 저승길의 노자가 동전 몇 개뿐이었던 시인.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만한 자유를 누리는 것도 그런 이들의 희생 덕분은 아닌지….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고향 안면도에 오는 7월 16일 세워진다고 한다. 사후 13년 만에 세워지는 시비가 해풍에 젖는 모습을 보고 싶다.


50·끝 이념의 상처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돼 나라가 온통 축제 분위기다. 정말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앞으로 후속조치도 잘 이뤄져 통일의 든든한 초석이 되길 충심으로 빌고 싶다. 온 국민이 다 그렇게 되길 바라겠지만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바람은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싶다. 이 선생이야말로 좌.우 양쪽에서 문학 활동을 벌이며 줄곧 통합을 꿈꿔온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탑골에 오셔도 늘 조용히 술을 드시다가 점잖게 돌아가신다. 그러나 선생과 같이 온 젊은 문인, 나이 드신 문인들의 면면이나 성향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인들로부터 한결같이 존경을 받으면서 인간성과 성실성만으로 이들을 통합해 온 사람이 이 선생이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이 선생은 해방기와 6.25 와중에 당시 남노당 충남 보령 지역 위원장이던 아버지를 잃은 것은 물론이고 위로 세 형이 죽어 넷째인 이 선생이 장남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단의 비극이 어떤 그늘을 드리웠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들은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선생이 열두 살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 꿈이야 대통령이나 장관, 위대한 발명가가 되겠다는 게 그 당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선생의 꿈은 남들이 으례 가지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이른바 좌익 집안으로 낙인 찍혀 언제 풍비박산 날지 모르는 긴박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서 이 선생은 열두 살 때 우연히 책방에서 6.25때 부역을 하고도 살아남은 이야기를 읽었다.대구의 L씨라는 문인이었다. 철없던 소년이었지만 앞으로 살아남는 길은 문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다. 문인이 되려면 신춘문예나 잡지를 통해 등단해야 하는데 당시 가장 앞장서서 반공을 외쳤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추천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이 선생은 마침내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1965년 소설가가 됐다.

  문학하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이란 생각으로 정진했다는 사실, 그것도 세상물정을 모를 나이인 열두살 때 인생의 길을 결정했다는 얘길 들으며 나는 우리에게 드리워졌던 이데올로기의 덫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실감했다.

  이 선생은 보수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가 발행하던 '월간문학' 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월간 '한국문학' 이 김동리 선생에 의해 창간됐을 때는 거기에서 편집장을 했으며 이후에는 진보적인 문학잡지인 '실천문학' 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70년대 초 '한국문학' 에서 일할 때에는 반정부 활동의 선봉장 격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많은 일을 하다 이제 이사장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한국문단의 좌우를 망라한 실질적인 증인이자 주역인 셈이다. 좌우 양쪽을 아우르는 일을 해온 이 선생을 욕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듯 안주삼아 남을 비판해야 직성이 풀리는 술좌석에서 조차 이 선생은 칭찬의 대상이었다.공적은 늘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뒤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가장 앞장선 때문일 것이다.남북 분단이 드리운 그늘의 극심한 피해를 소설로 가꾸어낸 이선생의 한(恨)의 승화가 남북정상의 합의문을 이끌어낸 바탕은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운 탑골의 단골 술꾼들은 기실 다 이문구 선생 같은 분들이었다. 핍박 받으면서도 문학과 예술의 맑은 혼과 실천하는 양심으로 시대의 어둠을 거두워 나간 이들, 시대의 고통을 술로 달래며 자꾸 혼탁해지려는 양심을 알콜로 씻어내던 이들이 우리 탑골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엮어내던 순정의, 격정의 대서사가 이제 통일로 이어질 것이다.


<출처> 네이블로그 blog.naver.com/ohyh45 (송풍수월)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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