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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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2)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2)




21. 시인의 아내

  내가 막상 결혼해 살아보니 보통 아내들이 바라는 것은 남편이 여느 집 남편들과 비슷하게 퇴근도 하고 함께 외식하는 것 정도로 소박한 것 같다.그 점에서 보면 문인의 배우자는 보통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5박 6일이 되도록 집에 가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다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양반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사인 시인의 부인은 아무렇지 않았으니 놀라울 따름이다.물론 마지막 날은 소설가이며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알려진 이창동씨와 강형철 시인이 체포조(비슷한 동료들에게 끌려갔다는 뜻으로 붙인 말이다)로 와서 잡아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들 또한 별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했고 웃기까지 했으니 문인들이 그 점에선 여느 사람들과 다른, 딴 세상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우선은 1980년대 중반 무려 2년에 걸쳐 수배를 피해 다니느라 여기저기 도피생활(잠수함 타기라고 불렀다)로 전전했고 대학 시절에 두 번, 졸업 이후 89년 '노동해방문학' 발행과 관련해 또 한 차례 감옥생활을 했으니 일주일 정도의 가출은 애교로 봐줄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김사인 시인은 박노해 시인을 시단에 소개했다. 또 그와 더불어 '노동해방문학' 을 창간하여 80년대 후반 이른바 문학판의 이념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물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막대해 거의 파탄지경의 삶을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강요한 셈이었으니 소재가 파악되는 상황에서 며칠간 가출은 오히려 안심할 일이라는 것이 친구들의 말이었다.

  김사인 시인의 부인 또한 이는 그저 웃고 넘어갈 정도의 하찮은 일이라는 태도였다. 솔직히 여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그냥 넘어갈 일이겠는가.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존경심을 갖고 있거나 남편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포자기성 절망의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시인의 부인은 전자인 듯하다. 참으로 존경스럽다.게다가 김사인 시인의 경우 그런 공적인 농성(□) 외에도 청탁한 원고가 써지지 않으면 원고를 펑크내기로도 유명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이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두 번째 시집을 낼 때다.서점에서는 책 독촉이 빗발치듯했는데 해설을 쓰기로 한 김시인이 원고를 쓰지 않은 채 두어 달을 버티자 출판사는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마침내 실천문학사 사장이었던 송기원 시인이 김시인을 여관방에 넣고 열쇠를 잠가버렸다.그런 뒤 며칠 지난 후에야 원고를 받아냈다. 김시인은 당시 실천문학사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김시인의 부인이 보여준 상냥함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전화한 편집자도 김시인의 부인이 전화를 받으면 모두 유순한 편집자가 되었다. 원고가 늦어지는 것에 편집자보다 더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동시에 남편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한숨을 곁들이며 설명하니 도리가 없었다고들 했다.세상에서 제일 거두기 힘든 남편을 가장 의연하게 지켜간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

  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으면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한다. 탑골에서 김사인 시인이 보여준 그 모습은 자신을 유폐하고 스스로 몰락하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는지. 거기에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더해졌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그 사람들은 서로 멀리서 사랑하는 것일까?


22. 모범주당 이시영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같고 또 술을 마시거나 마신 후의 모습도 거의 변화가 없는 사람. 이시영 선생은 그런 사람의 대표급이다. 물론 신경림 선생이나 정희성 시인 등도 그런 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시영 선생이야말로 모범적인 단골이었다는 말이다.

  이 선생은 주로 고은. 신경림. 황석영. 백낙청. 송기숙. 안종관 선생 등 선배들과 어울려 탑골에 오곤 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20여년을 붙박이로 일하면서 편집장. 주간. 부사장. 사장 등을 역임한 관계로 후배들은 물론 제자급의 어린 후배들과 오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술을 기화로 누군가에게 주정을 한 바 없고 일행이 무사히 귀가하도록 챙기는가 하면 술값까지 계산하는 그야말로 '모범 술꾼'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술값 문제는 만만치 않았다. 개점 이래 술을 마신 후 단 한 번도 술값을 가린 일이 없는, 그러면서도 욕설만을 퍼붓던 손님도 있고 얼마 남은 술값이 빌미가 되어 발길이 뜸한 문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값을 가려달라고 연락을 하는 일은 탑골 사전엔 없었다. 내가 그렇게 여유 있게 탑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시영 선생 같은 틀림없는 고객(?) 덕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참으로 고맙다.

  참으로 반가운 사람 앞에서 흉허물 없이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듯 이시영 선생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별 이상한 얘기를 다했지 싶다. 그러나 사실 그런 고마움은 너무도 큰 것이다. 술꾼들이야 처음에는 호기있게 내가 산다고 큰소리도 치곤 하지만 워낙 주머니가 가벼운 문인들이라서 그게 쉽지 않은데다 술값 낸다는 사람이 먼저 술에 취해버려 난감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때 이시영 선생은 그야말로 생색이 나지도 않는 술값을 대신 물어주기도 하고 또 일행이 나눠 내도록 해 마치 탑골의 상무님처럼 일을 처리해 주었다. 성경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가장 긴요한 일을 해주신 것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 이시영 선생도 딱 한번 우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후배문인들 중 하나였는데 술이 얼큰해서 계속 시비를 걸었다. "시영이 형,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열나게 뒤치닥거리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안 실어 주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식들 시는 싣고…. 도대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매번 삼류 시인이고 거리에 나가 최루탄이나 맞으면 되고…." '창작과비평' 이 동료나 자신의 시를 청탁해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삼십 여분이나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 일은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좀 기다려보자"는 말도 하고 나중에는 "우리들 말고 다른 사람들 작품을 많이 실어야 실제로는 우리가 커지고 넓어지는 것 아니냐" 는 충고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그 문인은 심지어 "너는 상업주의 마름 아니냐" 고 극언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시영 선생은 벌떡 일어나 그 후배를 한참 노려보다가 "나 간다. 제발 이러지 말고 좋은 글 써라" 며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 후배는 막무가내였다. 주변에서 다른 문인들이 그 후배를 말렸다. 그러자 그 후배문인은 "이거 놔 썅"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에 집에 가려던 이시영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나와. 나랑 한번 뛰어보자.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순간 모두 놀랐다. 더구나 이시영 선생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동네 건달들처럼 주먹을 쥐고 한판 붙을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23. 장기전의 명수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달인 이시영 시인이 화를 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또한 그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오죽하면 주정하던 후배시인도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했고 고개를 꺾었으랴. 주변의 동료 문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정돈하였다.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면 상대는 무조건 잘못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는 분위기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시영 시인이 싸우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고 야릇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을 뒷산 소나무 아래서 사내아이들이 한번 뛰자고 합의한 뒤 서로 싸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며 솔방울을 주워서 멀리 던진 다음 상대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던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들은 모두 나이는 먹었지만, 백사장에 나앉아 희게 빛을 뿜는 조약돌과 모래에 엉덩이를 맡기고 드러누워 장난치다가 별 것 아닌 이유로 엉겨 싸우는 아이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만년 소년들이었다.그렇게 모범적인 이시영 시인도 송기원 시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은 달랐다. 두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어찌 보면 서로 너무도 달랐고 어찌 보면 너무나 닮았다.

  당시는 송기원 시인이 실천문학의 실질적인 대표였고, 이시영 시인도 창작과비평사의 핵심적인 중추였으므로 늘 후배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에 둘이서 오붓하게 마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너무 바쁘기도 했다.그러나 이 두 사람과 한두 명쯤 더 어울려 왔을 때는 그야말로 두주불사였다. 2박 3일도 좋고 3박 4일도 좋았다. 그쯤 술을 마실 때면 이시영 시인이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이 복희, 지금 문밖으로 그림자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누구지? 김사인. 박남철. 강태형. 김남일이 왔다갔다 하는데, 맞아?"

  그러나 그 순간 아무도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거명한 사람들은 어제 저녁 혹은 이틀 전에 같이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눈 이들로 이미 각자 집으로 간 뒤였다. 너무나 오랜 시간 취해 있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이 선생님, 그 사람들은 어제 집으로 갔어요. 너무 취했어요. 이제 집으로 가셔야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맞아, 집에 가야지" 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송기원 시인을 보고 "야, 기원아. 술은 그만 마시고 노래하자" 며 노래를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더냐. 손목을 잡고…. " '해운대 엘레지' 란 노래였는데 바리톤 풍 그 노래가 익어갈 무렵이면 송기원 시인도 어느새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한 손은 허리춤에 붙인 채 모둠발로 쫌쫌거리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춤추고 노래했다.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불평불만을 듣는 것이 직업이었고 후배들은 물론 선배문인들을 보살피는 일이 주업이었던지라 한번쯤 그런 의무감을 털어내면서 술을 마시며 눈빛으로 서로 달랠 수 있는 이들끼리 나누는 한판의 난장이 아니었을까. "반짝 반짝 작은 별" 로 시작하는 동요를 부르면서 어린애 같은 춤을 추며 인생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려는 듯 퇴행성 유희를 즐겼던 것은 떠나온 길과 거리를 서로 눈 끝에 얹어주려는 것은 아니었을는지. 지금도 그 풍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아름다움과 서러움이 밀려든다.


24. 스타들의 첫 모습

  탑골에는 출판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가끔 왔다. 자신들의 출판사에서 낸 책을 기자들이나 여타 문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일 말고도 출판계약을 하거나 출판계약에 앞서 '인간적 관계'를 다지기 위해서도 이곳으로 왔다.때로는 조촐한 형식의 출판기념회도 열렸는데 대개 어른들의 축하말을 잠시 듣고 술은 오래 마셨다. 축하의 노래가 가끔 불리기도 했고 시집 출판기념회의 경우 시를 몇 편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갓 데뷔한 문인들도 선배 문인들과 어울려 왔으며 때로는 문단에 주목을 받는 문인들이 기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오곤 했다.

  '서른 잔치 는 끝났다' 란 시집을 낸 최영미 시인도 데뷔하기 전 가끔 나타난 술꾼이었고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란 시집을 내고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허수경 시인도 한동안 단골이었다.그렇게 어울리면서 서로의 문학이나 살아온 세월들을 이해하면서 우의를 돋우곤 했다.

  소설가 신경숙씨도 93년 '풍금이 있던 자리'란 소설집을 낸 직후 탑골에서 만났다. 당시 신씨는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열 평짜리 독신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허수경 시인도 광화문 근처의 조그만 원룸에서 살고 있었는데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어울려 정담을 나누곤 했다.신 씨는 이후 '깊은 슬픔' '외딴 방' 등등으로 아주 큰 성과를 거두어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큼지막한 문학상을 여러 개 받을 만큼 큰 소설가가 되어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허수경 시인은 좋은 시집을 계속 내다가 독일로 유학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스타가 된 문인들이지만 당시 처음 만났을 때는 왜들 그렇게 수수하고 참하게 보였든지…. 물론 지금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당시의 모습이 내겐 훨씬 매력적이다. 지금은 '문학동네' 대표인 강태형 시인, 김사인 시인, 소설가 김성동 선생,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였던 박찬 시인, 문학평론가 김훈 선생, 강형철 시인 등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신경숙씨는 시종 별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씨를 익살스럽게 소개하였다.

  "에, 이 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황인숙 시인이 '북구풍의 미녀' 라고 말했던 것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85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심산유곡에서 붓과 펜을 갈고 닦아, 갈아 치운 붓펜이 수 천 자루요 아직 갈아야할 펜이 10킬로그램은 너끈히 남아있는 신예 소설가…. "

  그러자 한쪽에서 말을 받았다."아니 미인이라고 했으면 확실히 밀고 나가야지 느닷없이 사람 운운허는 것은 뭐여! 내가 보기엔 촌이서 금방 올라온, 오라버니 논에서 일할 때 샛거리 내러 갔다가 느닷없이 승질나서 상경헌 사람같고만."

  "에이 사람들 이렇게 놀리고 그러면 쓰나. 신경숙씨 고향이 정읍이지 나도 거기여. 나 정읍 동국민학교 나왔는디 어디 나왔능가?"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나선 사람은 박찬 시인이었다. 아무튼 그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은 서로를 소개하고 익혀갔는데 그런 자리들을 통해 서로의 작품에 대한 흉허물 없는 품평을 통해 성장해가고 또 성숙되어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자리의 뒷끝에서 신경숙씨가 노래를 불렀는데 정태춘 박은옥의 "북한강에서" 였다.


25. '공주병 시인' 허수경

  여자 문인들에 비해 키가 좀 컸던 신경숙씨는 몇 번이고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좌중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감동한 눈치였다. 누군가가 촌에서 갓 올라온 소박한 누이 같다고 말했던 터라 모두 그렇게 멋지고 세련되게 노래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잔잔하게 잦아들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노래는 가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모두를 참으로 조용하게 만들었다.'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로 매듭지은 노래를 들으면서 신예 소설가 앞에도 정녕 새로운 날이 오고 서울사리의 낯설음이 안개 사라지듯 사라지기를 일행들은 절실하게 빌어주는 것처럼 엄숙해졌다.

  허수경 시인은 당시 실천문학사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이후 탑골을 마치 학교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송기원 시인이나 이시영 시인하고 같이 왔지만 뒤에는 스스럼없이 찾아와 친동생처럼 살갑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술을 잘했다. 주로 소주를 마셨는데 술을 마실수록 말이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혼자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신이 슬픈 이유를 설명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자기가 너무 예뻐 사람들이 시기한다' 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법이지만 허 시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소 황당했다. 키는 작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주근깨도 몇 개 있는데다 쌍꺼풀 없는 소박한 눈을 가진 허 시인인지라 마음의 아름다움이라면 모를까 외양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정말 인정하는 것은 허 시인의 노래솜씨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잔잔하게 시작하는 양희은의 '한계령' 이나 잘 익은 젓갈같이 몸에 척 들러붙게 만드는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다.그런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은 허수경 시인에게 흠뻑 빠져든 표정이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이 예쁘다는 근거로 삼은 것은 아닐지.

  그런데 그런 예쁜 모습도 잠시, 누군가가 "너 예쁘다"거나 "너 시 좋더라" 라고 말하면 참지 못했다."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생각하느냐" 혹은 "당신이 내 시에 대해 정말 아는 거야" 라는 식의 말도 서슴없었다. 한마디로 당차고 씩씩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과 가벼운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늘 우는 것은 허수경 시인의 몫이었다.  고향 진주에서 갓 올라온 '어린 소녀' 인 처녀 시인이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세계를 다지려는 몸부림이었음을 뒤에는 알게 되었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 못 참을까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2년 가을 독일로 홀연히 떠나 마르부르크 종합대에서 고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뮌스터에서 근동고고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잡지를 통해 읽으며 나는 허수경 시인이 자기가 예쁘다고 한 말을 조건 없이 인정한다. 국문학과를 나온 가난뱅이 처녀 시인이 혼자서 유학을 떠나 힘든 공부를 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커 보이고, 그런데도 그 일을 용기 있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26. 다정다감한 신경림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창밖으로 많은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주로 철도변에 핀 꽃들을 보며 알게 된다.

  본래 나는 서울 토박이지만 그래도 그런 꽃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누군가를 보고 웃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꽃들을 지고난 뒤, 특히 가을쯤에는 벼들이 베어지면서 군데군데 빈 공간들이 마음을 허하게 한다. 그러나 그때 꽃들이 이루어내는 풍경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이 살아난다. 시골 야산의 있는 그대로의 자태다.때로는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두 개 있는 묘소들의 무게조차도 힘에 겨워 낑낑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때면 그런 곳에 무작정 내려 한참 놀다가 저녁노을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진다.

  시인 신경림 선생님을 생각하면 나는 꼭 그런 야트막한 야산을 보는 것 같다. 어디 특별하게 높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실감의 측면에선 거대한 산인 사람, 한없이 큰 정감을 주면서도 소박한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늘 있는 그런 사람. 탑골을 하는 동안 신 선생님이 오시면 우선 마음이 놓였다. 실제로 신 선생님이 계시는 술자리는 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오갔고 늘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신 선생님이 오실 때는 거의 정희성 시인이나 문학평론하시는 구중서 선생님이 동행이셨지만 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김용태 화백이나 여타 장르의 많은 분들과도 어울려 오셨다. 물론 나이 어린 후배들도 함께 오기도 했고 때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오셨다.술은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게 마셨는데도 신 선생님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후배들과 어울릴 때 때로는 원로 문인들이나 옛날 문단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는데 그런 얘기가 오가는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쩌다 시간이 있으실 때 내기바둑을 두셨는데 바둑은 손으로만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바둑에 문외한이었던 나도 재미가 나서 그 옆에 서 있곤 했다.

  "아니 그 수가 있었남. 그 수에 졌군. 어허 큰일 났네. 그렇지만 이런 수를 알고 있는지 몰라. " "아하! 나는 끝났어. 그런 꼬락수가 있을 줄이야. 결국 그 수에 졌다는 이야긴가! 그렇다면 포기하는 셈치고 그냥 이렇게 두어볼까. '현현기경' 에 있는 순데 이 수는 상대가 알 때에만 빛이 나는 수라서! 요즘엔 상대가 워낙 딴 기보를 연구하고 오는 통에 잘 안 돼."

  대개 신 선생님과 김용태 선생이 두면서 나누는 이야긴데 바둑알이 놓이고 놓을 때마다 스스로 만족해하기도 하고 난감해지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바둑통에 꽉 찬 바둑알보다 많은 얘기가 대국 주변으로 넘쳐났다. 바둑이 끝나면 만원이나 2만원이 오갔는데 그 때마다 세상의 어떤 큰 보람도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드문 일이긴 하지만 혼자 오시는 때도 있었다. 대개 약속 시간 중간의 자투리 시간이 있을 때 오셨는데 그런 때면 가끔 신 선생님에게서 남들에겐 안 보이는 어떤 회한이랄까 쓸쓸함이랄까, 어쨌든 그런 것을 느꼈다.평생 직업 한 번 제대로 갖지 않으시고 그러면서도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해 보이지도 않은 안성맞춤의 어떤 선비의 모습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데 그것이 뭔지 나는 모른다. 늘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일 수 있으려면 가을 낙엽이 등밑으로 성애를 거느리고 있듯이 쓸쓸함을 스스로도 모르게 거느리는 것은 아닐지.


27. '신경림'의 유래

  어쩌다 한 번씩 그런 모습을 보았지만 신경림 선생님의 본령은 그야말로 서민풍의 익살과 해학이다. 또한 언제 뵈도 나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한결 같아서 놀랍다. 언젠가 선생님께 '언제 뵈도 늘 그대로인데 비결이 뭐예요'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일초도 생각 안하시고 '내가 속이 없어서 그랴'라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에이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하고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듣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런 선생님이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1989년 추진한 남북작가회담과 관련해서다. 그때 선생님을 비롯한 20여 명이 판문점으로 향하다 경기도 고양시의 속칭 '여우고개'에서 마포경찰서로 모두 연행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일행은 마포서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선생님의 본명이 신응식이라는 것이 밝혀져 많은 사람들이 취조를 받는 가운데서도 재미났다는 것이다.

  일행이 모두 분단이래 처음 시도된 남북작가회담이 무산된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는데 연행된 소설가. 시인들을 형사가 불러 취조를 시작했다. 그런데 분명 일행 중에 한사람을 부르는데 낯선 이름이 거명되더라는 것이다. 형사가 부른 이름은 신응식씨였다. 그 이름은 당시 연행된 사람들 중에 있던 문인의 이름이 아니어서 일행은 모두 다른 사람을 잘못 불렀거니 생각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신경림 선생님이 '예'하고 답을 하며 나가시더라는 것이다.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신 선생님 부른 게 아니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신 선생님이 나가시면서 "신응식이가 내 이름이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하도 우습고 또 이름이 너무 시골스러워서 또 배꼽을 쥐었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짓궂은 후배들이 "신응식 선생님 술 한 잔 하시죠" 라고 응석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흔쾌하게 "하 그 이름이 너무 촌스럽지" 라고 말씀하시며 필명을 쓰게 된 내력도 더불어 말씀하셨다. 붓글씨를 쓰다 보니, '應' 자와 '植' 자가 획이 촘촘해서 여간 해서는 맵시가 안나 그 글자들과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써본 것이 경림(庚林)이라는 글자였는데 맵시가 나서 필명으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자 신 선생님의 소탈한 모습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신 선생님의 시 중에서 '파장' 이란 시가 제일 좋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로 시작되는 그 시는 불과 열세 줄짜리 짧은 시인데 그 짧은 시 속에 시골의 장터풍경과 그 속에서 울고 웃는 가난한 서민의 깊은 속마음이 다 들어 있다.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심심하면 참외도 깎아 먹다가 약장사가 오면 약장사가 들려주는 음악에 발장단도 치고 결국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를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며 돌아오는 풍경은 너무나 구수하고 쓸쓸하다.

  사실 못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흥겹기는커녕 지겹고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그 지겨움과 짜증이 어느 순간에는 오랜 체념과 절망 속에서 흥겹고 정겨운 모습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속내를 참으로 아름답게 써주셨다고 생각한다. '농무'라는 시집으로 우리의 누추하고 허름한 살림살이를 살만한 삶의 세계로 건져 올리신 이후 '새재'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의 시집을 내시면서 늘 우리 남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신 선생님은 내게 있어서 영원한 참 시인이다.


28. 의리의 사나이

  시인. 문예지 편집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출판사 사장, 이런 직함을 함께 가지거나 경력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급박한 상황이나 시인이라는 반자본주의적 직함을 고려할 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직함 옆에 권투선수를 넣으면 어찌 될까. 권투선수 시인 혹은 권투선수 출판사 사장(?),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런데 그런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아니 그래서 더욱 한사람의 독특한 모습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다. 문학동네 사장인 강태형 시인이다.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무작정 상경하여 자유실천문인협회 총무간사. '실천문학' 편집장 등을 거쳤다가 88년 출판사를 세워 경영하다가 인계하고 난 뒤 다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뒤 계간지와 문학서를 내는 출판사 문학동네 사장이 된 사람, 이것이 강태형 시인의 표면적 약력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직함보다 '의리의 사나이 돌쇠' 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싶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그가 한때 잘나가던 권투선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하겠지만 탑골에 와서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신 후의 여러 모습에서 비롯된다. 언젠가 눈빛만으로 막강한 경찰들을 물리친(?) 얘기도 하였지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동안 불의한 일은 참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선배와 관련된 일들은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챙기고, 때로 보살핀다고 느낄 만큼 위해주었다.

  또한 '실천문학' 편집장을 하는 동안 그가 보인 일에의 열정과 성실성은 당시 책임자였던 송기원 시인에게 귀가 따갑도록 듣기도 했다.실천문학사에서 펴낸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 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는 몇날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일을 했다고 들었으며 이후 출판사를 창업했을 때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사람도 강태형 시인이라는 것이었다.아마도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문학동네라는 출판사가 나름대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속문인 돕기 일일주점을 열고 난 뒤의 일로 기억난다. 황석영. 박노해 씨 등 문인이 감옥에 있을 때 영치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서대문 네거리 호프집에서 일일주점이 열렸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뒤풀이 장소는 어김없이 탑골이었다.서로가 수고한 것에 대한 위로 겸 반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소란스러운 싸움으로 비화되는 수도 있어서 구속문인 돕기 일일주점이 아니라 구속문인 생산 일일주점이 아니냐는 농담 같은 우스갯소리도 나오곤 했다.그런데 그런 날이면 마지막까지 뒤처리를 하는 것은 강태형 시인이었고, 후배들은 후배들대로, 선배들은 선배들대로 결 따라 잘 정돈함으로써 그야말로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하곤 했다.

  다 보내고 난 뒤 마지막으로 한두 명이 남았을 때 나는 "당신 시집은 언제 낼 것이냐" 고 물었다.남들 시집이나 소설집을 내주면서도 자신의 것은 챙기는 바 없고 전세 돈까지 날리며 출판을 열심히 하는데 도무지 기울어만 가던 당시 자신이 경영하던 출판사 사정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

  "왜 나라고 시집 한 권 내고 싶지 않겠어.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이후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죽어가고 병신돼 가는데 그런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시는 안 써지고 그렇다고 다른 시도 쓸 수 없고…. 대신 남들의 책이나 내주는 거지 뭐. 별걸 다물어!"  그런 말이 내가 들은 강태형 시인의 간단한 소회였지만 그것이 어찌 자신의 시적 능력에 한정된 말이랴. 남들의 뒷자리, 그늘에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강태형 시인이 보여준 진짜 의리가 아닌가 한다.


29. '위대한' 연극인들

  탑골에는 문인들만 온 것은 아니다. 노래하는 이, 연극하는 이, 미술 하는 이도 많이 왔다.이런 예술인들 가운데 '어느 장르의 예술인이 제일 가난하냐?' 고 내게 묻는다면 '연극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연극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돈을 낸 것은 거의 없었으므로. 대개 그분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대신 술값을 내주곤 했는데 그마저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연극 한 편을 올리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고 또 올려봐야 적자가 나기 일쑤니 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사서 하는 고생을 통해 불세출의 배우가 탄생해 일반인에게 벅찬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지금은 국립극장 극장장인 김명곤 선생은 내가 탑골을 하는 동안 '아리랑' 인가 하는 극단을 운영했다.가끔 친지들과 어울려 탑골에 왔는데 나는 연극인들의 고생이 자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인사치레로 '공연하면 티켓 좀 보내주세요' 하고 말을 건네곤 했다.김 선생은 공연을 하면 표를 10여장쯤 보내오곤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기에 해당하는 값은 늘 치르고 어쩌다 시간이 나면 공연도 보러 가서 음료수를 몇 박스 넣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상의 그 무엇을 지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찡했다. 음료수 몇 박스에도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했고. 어느 날 극단 단원들에게 술이라도 한 번 대접하고 싶어 김명곤 선생한테 내 뜻을 전달했더니 "말이라도 고맙다. 언제 그런 기회가 되면 한번 연락하겠다" 고 했다.

  그 뒤 무심하게 지냈는데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공연을 끝내고 연락이 왔다."뒤풀이를 하고 싶은데 지난 번 약속을 지킬 수 있느냐" 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웠다. 순수한 호의를 받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사람들 모시고 오라" 고 했다. 대략 20여명 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아무 계산 말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고 했다. 맥주 한 박스면 20병이니 열 박스면 충분하겠거니 했다. 당시 맥주는 4홉들이 큰 병인데다 여러 번 행사를 치른 내 경험으로 봐도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손님들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그냥 둔 채로 탑골 식구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실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날 김 선생 일행은 자정을 훨씬 넘겼는데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열 박스를 더 갖다 놓고 탑골 식구들은 잠을 잤다.아침에 일어나 설마하고 확인해 보니 남은 술이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오는 행사에서도 맥주 열 박스면 충분했는데, 그것의 두 배를 마시고도 부족해 소주 등도 말끔히 비웠으니!

  우리들은 정말 놀랐다. 게다가 그렇게 마셔댔으니 화장실 형편도 말씀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식구들이 불평을 쏟아놓을 기세였지만 내가 별일이라며 즐거워하자 차마 그런 내색은 하지 못했다. 대신 그때까지 '용맹정진' 한 사람들을 위해 해장국을 끓였다.술고래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났다. 한편으론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론 어이없기도 했고 또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슬프기도 했다. 거대한 술꾼들!그 뒤 그날 술자리에 왔던 일행들을 만나면 극단 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날처럼 푸짐하게 술 마신 일이 없었노라고, 월급이라고 5만원 정도 받으며 이리저리 뛰니 언제 한 번 마시고 싶던 술을 실컷 먹으며 한풀이를 할 수 있었겠냐며 행복해했다는 말을 건네주곤 했다. 감사하다. 지금은 모두 새로운 자리에서 그날을 말하며 이 시대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기를.


30. 천하의 가객

  지금은 자정을 넘겨도 술을 파는 곳을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5공화국 시절 자정 이후 술을 판매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그러나 술꾼이란 늘 '마지막 한잔 더' 가 있어야 그날의 일정을 마치는 법이어서 탑골이 그런 역할을 가끔 했다. 물론 심야에 영업을 하다가 단속에 걸려 한번은 보름, 또 한 번은 한달이상 영업정지를 당한 적이 있다.조금 일찍 오든지 아니면 자정 쯤 되면 두말없이 나가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딱 한 병' 만 더 먹다 보면 자정을 지나기 일쑤였다. 그런 때는 가끔 아예 내실로 들어가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을 생일로 정하고 단속이 나오면 생일잔치를 한다고 둘러대기로 하고 밤새워 술 마신 적도 꽤 있다.그런 때는 문을 걸고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가끔 문이 매우 덜컹거렸다. 단속이 나와도 가끔씩 그런 일이 있었고 아닌 때는 그 굳센 음주가무의 문사(文士)들이 다급해서 찾는 경우라 현관문에 가서 목소리로 판별하여 아는 사람이면 돌아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물론 그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말이었지만.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현관문이 덜컹거려 갔는데 목소리는 과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박남준' 이란 말에 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평소 술을 마셔도 뒤뜰에 핀 채송화 마냥 잔잔하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자주 오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는 날은 대개 송기원 시인이나 강형철 시인의 청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기막히게 서럽고 좋아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나는 시인이었다. 문을 열자 너무도 미안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매우 안심이 된다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듬거리며 찬찬히 말하는 내용을 듣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다.박남준 시인의 말은 탑골을 찾기 위해 무려 두 시간 이상을 헤맸다는 것이었다. 전주에서 올라와 일을 처리하고 아는 사람 몇이라도 만날까하여 탑골을 찾아 왔는데 거기가 거기 같고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그러다가 주변을 맴도는 이상한 남자들도 만났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게이들과 만난 것이라고.

  당시 탑골 주위엔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는데 박남준 시인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도니 필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주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런 암시만 주었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고 혹시 인근의 불량배들이었을 수도 있겠다.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안으로 들어왔으니 술자리에 합류할 수밖에. 실례의 말이지만 당시의 박남준 시인의 모습은 너무 예뻤다. 막 소녀티를 벗어난 여자처럼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향기가 있었다.

  게다가 '쑥대머리' 같은 판소리 한 대목을 뿜어내면 우리 가락의 서럽고 기쁘고 욱신욱신한 맛에 가슴이 더워졌고, 여성스럽게 몸을 살짝 꼬면서 '삼다도 소식'을 부를 때면 모든 사람이 어이없어 멍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가성으로 내는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 대목에선 모두 뒤집어졌다. 영락없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기왕에 주는 것 다 준다' 며 송창식의 '선운사에서'를 부를 때면 모두가 노래 속에서 떨어지는 동백꽃과 함께 저 고창 선운사나 각자의 마음속에 어여쁘게 피어있던 동백 숲으로 가서 엉엉 울고 말았다. 동백꽃이 바로 눈앞에서 툭툭 지며 우리 모두를 섧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하가객 박남준 시인은 지금 어디를 홀로 떠돌며 서럽게 노래하며 정갈한 시를 쓰고 있는지.


31. 작은 거인

  김정환 시인베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 이렇게 말하면 술을 많이 마시고 아무데서나 잠을 청하는 사람을 연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네가 함부로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다. 사실 그 베개는 책이었다. 그것도 우리말이 아닌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된 책들이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일 년에 무려 원고지 2만장을 써대는 사람이 있다.시는 물론 소설에서부터 역사서까지, 그것도 모자라 음악에 관한 책까지 그야말로 전방위로 책을 써대니 사람은 사람이되 사람 같지 않은 그런 사람이 바로 김정환 시인이다.

  1980년대 이후 김정환 시인이 거치거나 만들었던 단체 또한 한 두 개가 아니다. 탑골을 운영할 때에는 주로 문학인들과 어울려 왔지만 다른 곳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김 시인은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문화운동연합 등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80년대 초의 이른바 운동의 일환으로 문학 혹은 문화를 실질적으로 이끈 맹장 중의 한 사람. 고(故) 채광석 시인과 더불어 80년대 초반 모든 사회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작은 등소평' 이라 불렀다. 김 시인의 경우 단체의 행사나 시상식의 뒤풀이로 가끔 왔지 한가하게는 탑골에 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탑골에 왔지만 분위기를 일거에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김 시인은 바로 그런 드문 사람 중의 하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행사의 내용을 점검하거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을 때에 김 시인은 일어섰다. 그러나 키가 너무 작아 별로 도드라지지 않는다.그런 체구에서 어떻게 많은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노래가 나오는 것인지! '제비' 라는 노래는 언제나 지정곡이었는데 처음엔 너무나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곁에 앉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작은 목소리가 서러운 가락을 타고 중반에 이르게 되면 백여 명이 모인 자리라 할지라도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 감탄을 시작한다.

  "사실 나는 김정환이가 쓰는 시가 좀 어렵긴 하지만 시는 어려운 것이니 그렇다 쳐. 그러나 산문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어려운 개념을 어떻게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연결해 나가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노래를 들어보면 알아. 저 자는 시인이야! 영락없는 시인이야."

  여러 얘기들이 있지만 김 시인처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깊고 서늘하고 처연하고 쓸쓸하고 그러면서도 유장한 맛이 나는 노래. 한 개의 형용사를 제대로 거느리기도 어려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 많은 형용사를 거느리고, 그것도 동시에 품에 넣고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노래! 이것이 김정환 시인의 노래였다.그렇다고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유쾌하게 담소하며 찬찬히 마시는 술은 어느 누구와 대작해도 늘 처음처럼 윤이 났다.

  한번은 채광석 시인이 말했다."김정환이는 인간이 아녀. '시와 경제' 동인이 모일 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김정환이 집에 몰려갔는데 우리를 재워놓고 쟈가 뭐를 한 줄 알아? 하! 타자기 옆에다 원서를 걸쳐놓고 가운데 손가락 하나로 타자를 치며 책을 번역하고 있더라고. 독수리 타법이지. 그러니 저게 괴물이지 인간이야. 그때 이래로 나는 쟤를 인간으로 보지 않기로 했어!" 명민하기로 치자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할 채광석 시인이 그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32. 문인들의 고스톱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즐겁다. 서로의 속옷이 어떤 색깔인지, 그리고 그것은 언제 갈아입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서로에게 탓 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탑골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에 김정환 시인이나 평론가 고(故) 채광석씨 등과 거의 떨어지지 않고 어울려 다니던 많은 문인들 중에서 외국어대 3총사가 있다.거의 같은 시기에 이재현. 현준만씨는 평론가로, 김남일 씨는 소설가로 문단에 나오면서 문학운동에 한바탕 풍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재현 씨는 노동문학에 대한 날카로운 평론을 썼고 현준만 씨는 '김지하론' 을 비롯해 문제적인 평론을 썼던 민중문학의 맹장들이었다.

  그런데 문학에 대한 이론을 펼칠 때보다 어쩌다 여흥으로 하는 고스톱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신랄하고 재미가 그만이었다."너 재현이, 니가 인간이냐□ 아무리 고도리를 치다가 돈을 잃었기로 개평 하나 주지 않고. 난 임마 그날 이문동에서 수원까지 걸어갔어. 알아!" "남일이 너한테 누가 걸어가라 했냐고! 같은 그림 찾아서 모아보면 점수가 되고 너는 안 돼서 돈을 잃은 것인데 무슨 불만이 많냐고! 야 우리도 수박통(머리) 깨지도록 연구해서 치는거야. 머리가 나쁘면 발도 힘들고 몸도 피곤한 거야. 괜히 비 십끗짜리 끝까지 들고 광 먹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 판은 육백이 아니고 고도리야 고도리. 새잡는데 괜히 빗자루 틀어쥐고 벌벌 떨며 민폐나 끼치고."

  그쯤이면 김남일 씨가 이재현 씨한테 다시 한 번 피바가지 쓰는 것으로 판명이 난다. 그러나 김남일 씨가 그냥 물러갈 수 있는가.

  "우리 아버지가 인간성이 나쁜 애들하곤 놀지 말랬는데, 아버님 말씀을 안들은 것은 내 죄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인간성 나쁜 것은 니 탓이야 임마 " "재는 아무 때나 인간성이래. 야 고도리가 인간이냐, 화투판이지. 그리고 너는 걸어가도 싸. 내가 너한테 차비하라고 천원 줬냐? 그 돈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또 덤벼서 그렇게 된 거고. 너야말로 고도리의 과학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발 고생이나 몸 고생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는 터무니없는 인간주의자야. 총으로 사람 죽인 전모한테나 가서 인간성 회복 플래카드 들고 왔다갔다 하시지."

  이쯤이면 그야말로 인간성 아름다운 김남일 씨는 얼굴이 벌개지고 '하이 참, 하이 참' 등의 탄식의 소리만 내게 된다. 그때 쯤 현준만 씨가 등장할 타임이다. "야 남일아. 너 바쁘지 않으면 종로서적 2층에 가서 책이나 몇 권 사서 공부해라. 가서 '과학적 고도리 이렇게 정복하라' 편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 이라는 명상서와 '고도리경(經)' 을 사서 5년만 수도해. 그러면 우리가 놀아줄게, 우리도 수원이 아니라 대전까지 걷고 싶거든. "

"너 현준만 그러는 게 아녀. 너 청년문인 MT 갔을 때 돈 좀 땄다고 그럴 수 있어. 돈 싹쓸이하고 개평 좀 달래니까 점퍼 속주머니에 그 돈 다 넣어두고 엎어져서 잤지. 잠자는 사이에 누가 지 주머니에서 돈 빼갈까 봐. 너도 인간성이…."
"야 그러면 그렇게 어렵게 돈 땄는데 뭐 하러 돈을 돌려 줘. 그러려면 하지 말든가. 괜히 하고 나서 쓸데없는 불만이나 털어놓고. 그러니까 운동을 할 때는 운동을 하고 고도리를 칠때는 고도리를 치고 그래야지. 운동인지 고도린지 구분이 안 되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쓰고 이재현이가 감수했으니 책이나 사봐. 나도 인세 좀 챙기게."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서점에 가면 그날 장난치면서 한 말이 실제로 실현되어 있다. 고스톱이나 카드 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실제로 많이도 나와 있으니.


33. 저 높은 곳을 향해

  '문학을 해도 운동으로, 놀이를 해도 운동으로.' 그것은 외국어대 3총사의 원칙이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저서는 안 되는 것이며 늘 새롭게 전투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문학평론을 하던 이재현 씨는 박노해 시인 등장 이후 우리 문학의 쟁점이 되었던 노동문학의 문제를 탄탄한 사화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문학의 중심 테마로 만들어 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현준만 씨 또한 노동문학의 중심문제를 쟁점화 하는 일은 물론 '김지하론' 등을 통해 문학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담론을 제기하면서 주목을 받는 평론가였다. 게다가 소설가 김남일 씨를 비롯하여 세 명 모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중요한 분과를 맡아 간사를 하던 맹장들이었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비판했지만 언제나 동지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3총사가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각기 달랐다. 술을 마시고 가장 먼저 흥분하는 사람은 이재현 씨였고 가장 늦게 발동이 걸리는 사람은 김남일 씨였다. 나는 노래도 노력 여하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모범적인 사례가 김남일 씨라고 생각한다. 김남일 씨가 처음에 노래하던 모습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의 풍경만 떠오른다. 듣는 사람이 참아야 하겠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곡조 무시하고 제 마음 따라 부르는 노래일 것이다. 낮게 소리 내야 할 때 높게 소리 내고 늘여 불러야 할 때는 안 늘이고 짧게 끊어야 할 때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 참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노래에 심취해 있는 정도는 참으로 깊고 너른 것이어서 듣는 사람이 눈을 감고 꾹꾹 눌러 참다가 마침내 웃을 수밖에.

  그러던 김남일 씨도 몇 년 후 '비 내리는 고모령'과 '고향의 그림자'를 부르는데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김남일인가 하고 모두 눈을 커다랗게 뜰 정도로 박자와 높낮이가 거의 맞아떨어졌다. 김남일 씨가 새롭게 보였다. 또한 그의 독특한 노래를 들어준 많은 동료들의 인내심이 꽃을 피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김남일 씨가 '득음의 경지' 에 이른 것은 밤을 세워가며 목이 쉬도록 서너 곡을 집중적으로 부른 뒤였다는 증언을 들은 바 있다. (그 노래를 들어준 사람에게 복 있기를)김남일 씨는 술에 취하면 마음의 곡조대로 늘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에 더하여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 중에서 높이 솟아있는 것만 보면 못 참고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한 고약한 취미활동(?)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시민을 위한 문학교실'을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었는데 종강 때면 가끔 한강둔치에서 밤을 새며 뒤풀이를 했다. 그런데 김남일 씨는 새벽만 되면 농구골대에 올라갔다. 한번은 전봇대를 끌어안고 꺽꺽 울기도 했다. 너무 미끄러워 올라가기 힘들어서란 것이 그 이유였다. 술에 취하면 왜 어디로든 올라가고 싶었을까?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당시 앞이 안 보이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온몸으로의 항의나 거부의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준만 씨는 노래를 맛있게 불렀다. 또한 '공포의 바이브레이션' 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목포의 눈물' 이나 '갈대의 순정'을 부를 때면 듣는 사람의 마음도 노래의 떨림대로 흔들렸고 조금 과장하면 잔에 담긴 맥주마저 몸을 떨었다. 서로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198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모습은 같이 어울렸던 문학평론가 김명인. 백진기씨, 소설가 김인숙. 정화진씨 등과 더불어 민중문학 한 중심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지금 무르익은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도 그 고도리를 치고 있는지?


34. 탑골의 귀빈

  머잖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한 시민의 입장에서는 그 일이 잘되어 남과 북이 서로 화평하게 사는 일에 큰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통일과 관련된 일을 매스컴을 통해 알게 될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다. 늦봄 문익환 선생님이다.

  민족의 통일이라는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큰 열망을 지니시고 또 그런 일에 참으로 몸을 던져 애쓰신 분. 이런 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어쭙잖은 헌사겠지만 그분은 가까이서 뵐 때나 멀리서 뵐 때나 참으로 따뜻하고 큰 산 같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골에는 돌아가시기 전 딱 한번 오셨지만 탑골에 들르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고 또 방북한 일로 감옥에 계시는 동안 구속 문인돕기 일일주점 등을 통해 조그만 힘을 보탠 일도 있어서 매우 많이 오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하기사 그분이 직접 탑골에 오시고 안 오신 것이 무엇이 중요하랴. 이미 우리 모두에게 큰 어른이자 숨결인 것을.

  하지만 탑골에 오신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출옥 후 여의도에서 무슨 행사 후에 많은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계셨다. 술은 한 모금도 안 드셨는데 일행과 아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시고 찬찬히 말씀하셨다.

  "한 선생 나 탑골 얘기 많이 들었어. 꼭 고향에 두고 온 누이같이 생겼구만. 여기 짓궂은 사람들 많이 오지? 다 괜찮아. 그러잖아도 내 언제 시간을 내서 꼭 한번 찾아오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이제사 왔구만. "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말씀이었다. 더구나 손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마치 어떤 정기가 마음으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마음속의 병들이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진담이라고//(중략)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선생님의 '두 하늘 한 하늘' 이란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잠꼬대 아닌 잠꼬대' 라는 시의 앞부분인데 그 말 그대로 당신이 그 엄혹한 시절 방북 하시고 정겹게 그 누군가를 끌어안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큰 분을 내 인생에서 만난 적이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 그 시의 뒷부분에 "역사를 산다는 것은 훈장이나 타는 일이 아니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는 일이며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 이라는 말은 지금 들어도 신이 난다.그리고 그 다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면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걸어서라도 가겠다" 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선 눈물이 난다.

  우리는 그 때 참으로 머리가 말짱한 바보들은 아니었는지. 그 시를 쓰고 꼭 그대로 살아내심으로써 그분의 삶 자체가 시가, 아니 역사가 됐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지금이라도 어디선가 그분이 성큼성큼 걸어오셔서 '복희야 잘 사느냐' 고 물을 것만 같은데 이것은 착각일까? 초여름인데도 나는 눈 덮인 야산 사이에 선명하게 찍혀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어여쁜 발자국 하나 가슴에 안는다.


35. 마음 편한 손님

  이야기를 하다보니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문인들 이야기가 많이 되고 말았는데 그 분들과는 조금 다른 분들도 탑골에 오곤 했다. 물론 특별하게 다르다기보다는 같은 자리에 어울리는 일이 적었던 분들이라고 해야 옳겠다.

  소설가 김원일. 김원우. 이문열 선생님, 문학평론가 정현기. 김화영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인데, 나이 드신 민족문학작가회의 쪽 어른들은 서로 어울려 반갑게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그분들은 홀의 한쪽에 어울려 참으로 점잖게 술을 마셨다. 어지간해선 노래도 안 불렀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서 편안하게 술을 드셨다.그분들이 오시면 내가 바쁘게 뛰어 다니거나 곤혹스러운 일은 조금도 없었다. 실례의 말이지만 그런 분들은 아무리 많이 오셔도 나 혼자 얼마든지 술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다만 그분들 중에서 정현기 선생님은 가끔 한 잔 하시면 노래도 하시고 좌중을 재미나게 휘어잡고 얘기도 하셨다.정현기 선생님은 염무웅 선생님하고도 친구 사이여서 민족문학작가회의 팀들과 같이 어울려 술을 드시기도 했는데 노래를 할 때는 가곡을 주로 불렀고 정지용의 '향수' 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는 일품이었다. 훤칠한 키에서 바리톤 풍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올렸고 마시는 술잔을 그윽하게 바라보게 했다.

  이문열 선생님은 한국기원에서 바둑대회가 있는 날 대회가 끝나고 난 뒤 가끔 오셨다. 많은 술을 드신 것은 거의 못 봤고 또 매우 바빠 보였다. 그런 때는 밤늦게 신문이나 잡지에 기보 해설을 쓰는 노승일 씨나 지금은 소설가로 더 알려진 성석제 시인이 오기도 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약간의 소란은 있었으나 모두 점잖은 신사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은 모두 너무나 점잖아서 한분 한분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무래도 조금은 시끄럽고 또 싸움도 있는 술자리여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민화투급 대작' 이란 말이 생각난다. 어느 해인지 분명치 않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신년하례식을 마치고 여러 어른들과 함께 소설가 송기숙 선생님이 오셨을 때다. 신경림 선생님이 무슨 얘기 끝에 '왜 백낙청 선생은 안 왔느냐' 고 묻자 송기숙 선생님이 한순간도 생각지 않고 답을 하셨다.

  "하이 참 고게 무신 소리당가! 나가, 백낙청이 하고 술을 마실라 하믄 차라리 우리 외할머니 허고 민화투 치겄네. 고렇게 재미없는 사람하고 무신 술을 마시겄능가?" 전라도 걸쭉한 사투리에 얹혀 나오는 그 말에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쥐고 웃고 말았다. 사실 백낙청 선생님은 탑골에 가끔 오셨지만 거의 들른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오래 계시지 않았다.또한 여간해서는 한잔 이상의 술을 드시지 않았는데 술 마시는 사람이 어디 그런가. 권커니 잣커니 해야 술을 마시는 것이지. 더구나 송기숙 선생님처럼 두주불사인 분에게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으셨으리라. 소설 쓰시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그 표현이 정말 절묘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뒤에 술을 마실 때는 재미없게 술 마시는 사람들을 할머니와 민화투급 술상대라고 비아냥거리면서 마시곤 했는데 생각할수록 재미난 말이다.

  아무튼 앞에서 말한 분들이 오신 날은 너무나 평온했고 다른 술꾼들에 비하면 너무나 '민화투급' 들이어서 별다른 추억이 없다. 실제로 가장 큰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추억할 풍경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섭섭하다. 대신 인사를 올리고 싶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36. 시인의 행복

  세상에서 단 하루 살고 온 죄수도 평생 감옥에 있는 동안 추억할 일이 모자라지는 않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쪼개보면 볼수록 애틋하고 서럽고 때로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내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다.종로 네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경우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는 시큰둥한 반응 아니면 '말도 마소, 나같이 힘든 사람은 조선 팔도에 없을 것이오' 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싶다.

  탑골을 하는 동안 나는 진짜 자기가 부자라며 수줍게 웃는 사람을 보았다. 정희성 시인이다. 언제나 단정한 옷을 입고 늘 조용하며, 많이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모직으로 된 모자를 눌러쓰고 점잖게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 나를 은밀히 불렀다."복희씨! 나 말야 할 말이 있는데. " "예? 정말이세요. " 정희성 시인이 그렇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부르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나는 긴장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정말 비밀을 밝히는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다."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시가 두 편이야. 시 두 편이 내 가슴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이 여간 든든한 게 아니야. 내가 정말 부자라고."

  나는 다소 당황하였다. 가슴께에 두둑한 현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빗나갔기 때문이다.또한 하도 은밀하게 말씀하셔서 순간적이나마 로맨틱한 말을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시 두 편에 그렇게 나이 드신 분이 얼굴이 환해져서 행복할 수 있다니! 순간 그 말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부자 되셨으니 한턱 내셔야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멋없는 말이 없었다. '작품 쓰셨으니 얼마나 기쁘세요' 라든가, '시 한편 쓰여지면 그렇게 기쁜가 보죠?' 등등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송구스럽다는 생각이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단 한 가지 좋은 시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시인 아니던가!그런데 사실 정희성 선생님에게서 로맨틱한 그 무엇을 기대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술을 드시면 거의 '민화투급'이셨지만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할 만큼 노래를 그럴듯하게 불러주셨기 때문이다.다소 고색이 창연한 트로트풍의 노래였는데 제목은 '남포동 부르스'였고 노랫말은 상당히 고혹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 노래를 부르실 때는 순진한 청년이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 부르는 꼭 그런 모습이어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희성 시인의 어디에 그런 모습이 숨어있었을까 의심할 정도였다.그러나 정희성 선생님은 천생 선생님이셨다.

  지금도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로 초빙된 일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고 중등교육 현장을 지키신 것으로 안다.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자신의 키를 재려하지만 정희성 선생님은 그런 키 재기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맡은 일을 처리할 때는 꼼꼼하기로 소문이 난 김사인 시인도 머리를 흔들 정도로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 그런 분도 발표되지 않은 시에 한 생애의 보람을 다 얹어 흐뭇해하며 부자라고 큰소리치는 일이 있었으니…. 세상은 얼마나 그윽한 것인가.


37. 과묵한 주당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일이 있을 때라든가 위기에 처했을 때 크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구 선생님이 탑골에 오시면 참으로 조용하게 술을 드셨다. '과묵한 술꾼', 그런 말이 있다면 구 선생님께 딱 어울리는 말이리라. 대개의 경우 신경림. 민영. 정희성 시인 등과 함께 왔고 인병선 시인(신동엽 시인 부인)이 동행할 때도 있었다. 특히 신동엽 창작기금 수여식이 끝난 날은 틀림없이 탑골에 오셨다. 그런 때는 가게 안이 매우 어수선했고 좋게 말하면 활력에 넘쳤다. 또 그런 날은 술자리가 무르익게 되면 누군가가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을 하면서 노래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이야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데 큰 제약이 없지만 1987년 무렵에는 여러 제약이 많았다. 부르는 노래도 은근히 제약을 받았으며, 말하는 수위도 적당한 선을 넘는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그 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 선생님이 호명되어 노래를 불러야할 차례였다. 대개 연만한 어른들께선 트로트풍의 옛노래를 불렀던 터여서 그와 유사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난데없이 신동엽 시인의 시와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되면 분위기가 묘해져서 웅성거리게 되는데 구 선생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말씀하신 연후 노래 대신 좋은 시를 들려주시겠다며 정지용의 '향수' 를 낭송하시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납.월북 시인들의 작품이 해금이 되네, 안 되네 하던 때여서 약간의 긴장이 요구되었지만, 구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의젓하고도 장중하게 시를 암송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 매듭 되는 5연의 긴 시를 한의 막힘도 없이 낭송을 끝내자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러자 다시 한 말씀이 시작되었다."여러분이 좋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항상 마음속에 새길 말로 다산 정약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不憂國 非詩也' (불우국 비시야)라는 말인데 시를 쓰되 민족이라든가 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나라를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다소 과격한 이 말을 오늘같이 험한 세상에서 시인들이 늘 마음에 두어야 시가 음풍농월이나 한가한 자의 소일거리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래판이 걸판지게 벌어져 계속 소란스러울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신되었고 다소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다시 구 선생님이 "내가 느닷없이 분위기 망치는 얘기를 했노라" 며 대단히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냥 재미나게 노래하고 술 마시자고 제안하셨다. 그러자 누군가가 혼잣말로 한 마디 했다."구중서는 저게 병이야. 아무 때나 너무 무게를 잡는다구. 하기사 그게 구중서지, 어디가!"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지만 나는 가끔 마구 달려가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어딘가 한 번은 일단 멈춰서고 다시 갈 길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때에 바로 구 선생님이 지니신 풍모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

  구 선생님이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이라든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을 역임하시게 되는 일이 바로 그러한 모습의 방증이 아닐까?그렇지만 그런 구 선생님도 바둑을 둘 때는 달랐다. 바둑이란 묘해서 그 어떤 사람도 승부욕의 화신처럼 변하게 하는 요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 수 물러달라는 말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일이나 딴 돈을 호주머니에 챙기면서 짓는 그 표정은 전혀 다른 또 한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38. 영원한 '라이벌'

  탑골공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노인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자리였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언제부턴가 모이기 시작한 노인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정치적 소신을 발표하고 또 심심풀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 '중앙 노인정' 같은 역할로 더 알려진 곳이다. 가게가 바로 탑골공원 뒤쪽이지만 그렇다고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다. '근친혐오증' 이란 말처럼 '근처기피증'이란 말도 있음직한데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안 가는 그런 곳이 탑골공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 우연히 가보고 난 뒤에는 그곳에 가끔 들렀다. 우선 담장 하나에 가려져 있지만 현대식 도시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고 또한 그곳에 가족과 한나절을 떠나 있는 것이 일인 많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좋았으며 그러다가 가끔 생기는 싸움도 왠지 정겨워 보였다. 물론 그분들이야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일 테지만 싸우는 이유가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아서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싸우는 진지파나 투사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장기판이니 바둑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훈수를 두지 말아야 할 때 했거나 한 수만 물러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짓밟은 야속한 사람이란 것이 주된 이유였으니 얼마나 재미나는가.

  한때는 모두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주름을 잡던 분들이 이제는 그런 날과 경륜을 후대들에게 넘겨주고 장기판 말의 생사에 목숨을 거는 모습! 얘기가 길어졌지만 탑골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 만나면 대개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영 시인이다. 민 선생은 신경림 시인에게 주로 시비를 걸었는데 대개는 키와 관련된 말이었다.

  "야 꼬마야! 너는 어려서 얼마나 못 먹어서 그리도 작누?" "하이 요놈 봐라. 완전 땅꼬마가 어른한테 꼬마란다. 민영이 지가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큰 체 하는걸 보면 우스워 죽겠어. " 그런 때에 젊은 이승철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선생님들 신발 벗고 방으로 들어오시죠. 오늘은 정말 두 분 중에 어떤 분이 크신 것인지 결판을 내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이런 때에 김규동 선생님도 모시면 좋은데." 그

  그런 말에 한 분은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온다."민영이 너부터 들어가, 내 들어갈 테니. " "경림이 니가 들어와야지. 너 안 들어올라고 그러지?" "뭐야. 저번에 내가 들어가서 재보자고 했을 때 안 들어와 놓고!"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두 분의 키재기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서로를 힐난하는 것 같으면서도 눈에서는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을. 그러므로 두 분의 키재기는 영원한 숙제라는 것을. 그렇게 한바탕 하고나면 술자리는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다니는 민 선생은 별로 술을 안 하시지만 신경림 선생님은 꽤 술을 드시는 편이었다. 특히 두 분 모두 젊은이들의 생각을 많이 존중해주는 편이었고 가끔은 따끔하게 작품 얘기도 하는 편이어서 그런 때는 2차, 3차도 기꺼이 가셨다.그런 때에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묻곤 했다."두 분 선생님들 언제나 서로 키가 크시다고 하시는데 정말 누가 크신 겁니까?" 그러면 언제나 답이 똑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 그리고, 보면 몰라? 내가 더 크지!"


39. 움직이는 얘기보따리

  늘 어디서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분들이 있다. 그 중심은 어지간해서 이동하지 않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데 소설가 천승세 선생도 그런 분이다. 선생이 한 마디 하면 어떤 시구보다 빛이 났다. 날카로운 끌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용렬함과 비겁함을 쪼아냈다. 특히 천 선생의 경우엔 사람을 넘어 하찮은 동물에까지 두루 안 미치는 바가 없었으니….

  말 안 듣고 짖기만 했던 개의 코를 물어 개의 버릇을 고쳐준 이야기며 젊은 시절 가난한 연인이 곡물 부대로 지어 입은 속옷에 쓰인 '정량 20㎏' 등은 문인들에겐 고전이 됐다. 왕년의 주먹시절 이야기는 전설이 된지 오래다.어떻게 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뒤따르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전설' 이며 '움직이는 설화' 라고나 할까. 천 선생이 겪은 이야기 끈을 풀어놓으면 그대로 생생한 그림이었다.

  "내가 동네에 나갔다가 문열이 돼지 새끼 한 마리 안 얻어왔냐. 너 문열이 알아□ 돼지가 새끼 날 때 맨 처음 지 에미 그 곳을 열고 나오는 놈 말야. 고것이 다른 놈 허고는 다르잖냐. 안 커요. 그래서 그 놈을 일부러 매장해버리기도 하고 그냥 밟아 죽이기도 하지. 그런데 고놈이 너무 불쌍해서 내가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 고놈 생각하면 이뻐 죽겠어. 그래서 고놈하고 집에 있던 개를 내가 우유를 주고 키웠지. 니들 돼지란 놈을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고것이 영리한 디가 있어요. 한 5분 정신없이 먹고서는 한 10초 정도 명상하는 것 모르지. 명상할 때 돼지 표정을 보면 참으로 거룩해요. 그렇게 한 4개월 정도 키웠더니 중돼지가 다 됐어. 아참 그놈 이름이 깡돌이여. 왜 내가 그 멍청한 돼지한테 깡돌이란 이름 붙여준 지 알어?" 그쯤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술도 한잔씩 권하면서도 한시 빨리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

  약간 뜸을 들인 후 이야기를 계속한다."키운 지 3개월이나 되었을까? 한번은 밤중에 같이 키우던 개 흰돌이가 죽어라고 소리를 질러요. 흰돌이란 놈도 영리하고 사나운 놈인디. 무슨 난리가 벌어졌나하고 내가 나가봤지. 아 그랬더니 그 돼지란 놈이 흰돌이 국부를 우유 젖꼭진줄 알고 빨고 있었던 게야. 허 참, 그러니 그 흰돌이란 놈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지를 수밖에. 내가 그냥 버려두면 흰돌이가 죽을 것 같아서 돼지란 놈을 혼내서 중단시켰지. "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 콧물을 쏟으며 웃지만 천 선생은 웃지도 않고 계속했다."그래서 고놈을 내가 깡돌이라고 불렀던 거야. 그래서 이젠 '개하고 같이 키워서는 안 되겠다' 싶어 돼지우리를 만들어 키웠지. 그런데 고놈이 뭘 아는지 내가 가기만 하면 지 에민 줄 아는지 고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한 4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사고가 났어. 밥을 주려고 우리에 들어가서 고놈을 돌아 들어가는데 나를 머리로 받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재수가 없을라고 내가 넘어졌잖냐. 지가 싼 똥이나 오줌 속에 자빠졌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도 참았어야 했는데 못 참고 허벅지를 한 대 때렸지. 그랬더니 이 자식이 그냥 옆으로 가더니 픽 쓰러져요. 냄새 더럽더라고. 그런데 고놈이 점심 때에 가 봐도 일어나지를 못해. 그래서 보니 허벅지 부근이 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계속 자빠져 있는 거야. 결국 며칠 후에 죽더라고. 뒤에 확인해보니 허벅지 부근의 뼈가 으스러진 거래. 병들어 죽은 놈은 못 먹잖냐. 불쌍하기도 해서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줬지."


40. 자나 깨나 술조심

  힘 들여 친 것도 아니고 홧김에 돼지의 허벅지를 한 대 때린 것이 그 정도였다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하도 흐벅진 이야기의 뒤끝이라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어 천승세 선생이 가끔 쥐는 주먹의 위력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고 만다. 천 선생은 늘 그렇게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고 푸짐한 이야기꾼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출범한 이후에는 주로 구속자를 위한 복지활동에 힘썼고,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한 이후에는 자유실천위원장으로 또 부회장으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1987년 이후 각 대학에 민주동문회가 꾸려졌는데 천 선생이 성균관대 민주동문회와 전국민주동문회 연합모임의 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안다.그런 천 선생을 젊은 문인들이 많이 따랐다. 그것은 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장을 맡아 일을 하며 이른바 궂은일을 앞장서서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구속문인들을 위한 일일주점과 구속문인 석방촉구 시낭송회 등을 열며 많이 어울렸다. 그 때마다 천 선생은 때로는 신나는 육담으로, 때로는 문학하는 자세에 대한 준절한 가르침으로 후배들을 챙긴 것으로 안다. 천선생과 얽힌 일화를 하나 쯤 가지고 있지 않은 젊은 문인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 선생이 젊은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던 시절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지방에서 열린 시낭송회에 천 선생이 낭송 시인으로 참여했던 때의 얘기다. 대개 이런 행사는 일찍 끝난 뒤 큰 방을 잡아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도 벌이고 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외출해서 친지를 만나곤 하는데 그날도 천 선생은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오전 4~5시가 돼서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할 때쯤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박몽구 시인이 후배문인에게 "야, 이제 술판 끝났냐. 그리고 승세는 자냐?" 하고 물었다. 천선생과는 삼십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박 시인인지라 딴에는 친밀감을 과시하고 호기도 부릴 양으로 그런 소리를 했을 텐데 하필이면 천 선생이 자려는 방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이 탈이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천 선생은 문을 살며시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야, 승세는 아직 안 잔다. 그런데 니가 몽구냐?" 함부로 말을 했던 박 시인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야말로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었다. 다급해진 박 시인은 고개를 숙이며 "하이코! 선생님 아직 안 주무셨고만요. 나는 선생님이 주무시는 줄 알고…. " 하고 더듬거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박 시인은 옛날 대역죄를 진 죄인처럼 무릎을 꿇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예의 그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천 선생은 "야 니가 술이 좀 취한 모양이구나. 방에 가서 편히 자거라" 고 점잖게 타이를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탑골에 들른 문인들은 천선생의 그 일을 한참 동안 되뇌이곤 했다.아무튼 천 선생이 오시면 탑골은 늘 풍요로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또 싸움이 벌어지면 벌어진 대로 활력이 생겼다. 희한한 것은 모든 일이 원만히 끝나는 것이다. 천하의 싸움꾼이라 할지라도 천 선생이 나타나서 한번 휘둘러보기만 하면 조용해졌다.신라 때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피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 시절 천 선생이야말로 외롭고 서러워서 싸우기 좋아하는 문인들의 만파식적이 아니었을까?


<출처> 네이블로그 blog.naver.com/ohyh45 (송풍수월)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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