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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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1) 


<편집자 주> 최근 예술인들의 성추문이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술과 도박, 여자는 남성 문인에게 ‘낭만’으로 치부되어 온 문단 내 분위기가 성추행을 하면서도 범죄로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요? 이런 풍조가 끝내 여성을 같은 문인이 아니라 접대부로 취급하는 저급한 문화를 만든 건 아닌지요. 이번 기회에 해당 예술인들은 통렬한 자기 반성과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풍류 탑골  한복희 이야기 (1)




* 한복희(韓福姬)씨

  한복희 씨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의여고를 졸업했다. 곧바로 경찰시험을 치렀으나 최종 신체검사에서 낙방, 이후 국회의원 사무원 등으로 일했다. 86년 주점 '탑골'을 인수, 94년까지 운영했다.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사이 골목 붉은 벽돌의 허름한 건물 1층 30평 남짓의 탑골은 민주화가 절정으로 치닫던 무렵부터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까지 재야 문화예술인들의 시대와 일상에 대한 '모반의 장(場)'이었다. 한 씨는 그들에게 누님. 누이로서 말 벗. 술벗이 돼주었으며 은신처가 되기도 했고 투옥되면 뒷바라지에도 남달랐던 우리 시대 누이이자 최상의 '주모(酒母)'였다. 이런 한 씨에게 당시 재야문인단체였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감사패와 함께 준회원 자격을 줬다.

  한 시대를 가장 아프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의미를 위해 작가회의 사무국장이었던 강형철(숭의여대 교수)시인의 도움으로 이 글을 연재한다.



1.'모반의 무대'

  가게 안이 맵다. 사람들이 맨몸에 그리고 옷자락에 묻혀오는 최루가스 때문. 벌써 세 팀이 안방과 거실 그리고 칸막이를 건성으로 쳐놓은 룸으로 나뉘어 가득 찼다.

  "하, 자식들 겁나게 쫓아오데" "말도 마 그 자식들 사람 죽일라고 그 지랄탄을 쏘는 것인지 눈이 안 보이고 숨이 막히더라고"   "고만 허고 술이나 마셔. 최루탄엔 술이 약이랑게"

  군데군데에서 4.13호헌조치 때문에 일어난 시위 무용담이 꽃핀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 신나는 이야기소리가 잠시 후면 잦아들고 고함소리 욕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터져 나오는 노래 소리로 뒤바뀔 것이라고. 그때쯤 한쪽에선 술상에 고개를 처박거나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든 사람들도 출현한다는 것을.  '야 복희야 술 가져와' '여기 술 떨어 졌는디' 등 표현은 각각이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왔다갔다 하다보면 오늘 하루도 갈 것이라는 것을.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던 사람들. 술상 앞에서 처음엔 현인이다가 점차 지사가 되고 느닷없이 주정꾼이 되던 그래서 아름답던 사람들. 참으로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알콜로 혁명적. 낭만적 순정을 또 다시 맑디맑게 닦아내던 사람 사람들.

  거대한 노르웨이산 카페리호지만 높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든 그러하겠지만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 또한 마음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선상에 혼자 서있기도 부담스러운데 하객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넬 때면 그 흔들림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의 진동은 결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들, 한 시대의 격랑이었던 얼굴과 말들이 뱃전에 다가와 부딛치고 있었다.  남들은 우리의 결혼식을 깜짝 이벤트라고 부르겠지만 제주행 고속페리호 위에서 시작하려는 우리의 결혼식은 식장이 없어 물색하다가 찾아낸 임시변통이었다.

  서로 안 지는 1년이 넘었지만 결혼을 결정한 것은 불과 한 달 여. '그러므로 결혼식 그 자체가 깜짝 쇼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의 풍경도 선명하지 않다. 주례의 당부 말씀이 얼핏 떠오르고 이원규 시인의 축시가 낭송되고 박선욱 시인의 축가가 불려지고 난 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사람들과 어울려 인사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일 주일 간의 지리산 종주를 신혼여행으로 정해 구례 화엄사로 떠났다.

  그렇지만 결혼식 도중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식구들처럼 오가며 늦은 밤을 새웠던 한 시대 풍운아들의 풍류와 울분이 명멸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스치고 있었다. 고은, 김지하, 신경림, 황석영, 백낙청, 염무웅, 이영희, 이문구, 송기원, 이시영, 김성동, 김주영, 김원일, 조정래, 이문열, 김사인, 황지우, 이영진, 이재무, 강형철, 박철, 이문재, 고정희, 신경숙 씨 등의 문인은 물론 김명곤, 김민기, 임옥상, 강요배, 임진택, 정태춘, 나병식, 김상현, 박석무, 이해찬, 손학규, 이철용, 김태경 씨 등등. 통일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문익환 목사와 모시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 시키고 홀로 괴롭게 술병을 기울이던 허문도 씨 등등. 시대의 내로라 하는 문화인들과 정치인들의 갖가지 풍경과 말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2. '강도 시인' 김남주

  나는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는 모두 지워야할 이름들이었으므로. 십년 세월동안 탑골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들 옆에서 술시중 들며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체가 못내 즐거웠지만 이제는 나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결혼 후 난 무심하게 살았다. 전남 신안군에 딸린 한 섬에서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가능하면 흙과 더불어 소박한 섬 아낙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안에서 불과 한달 남짓이면 태어날 새로운 생명이 힘차게 뛰놀고 있다.

  그러나 가끔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다가 그 사람들과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며 웃기도 하다가 가슴이 아파지기도 한다. 울고 웃으며 지냈던 세월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아프고 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감히 붓을 들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야말로 살아 있는, 피가 도는 80년대 정신사라는 말도 해주셨지만 속 깊지 못하고 생각마저 짧은 내가 감히 기억을 추스르려 한다.

  당시 탑골은 '자실'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들의 단골 술집이었다. 내가 가게를 맡은 것이 1986년 봄이었으나 그 이전에도 김지하 시인의 석방 운동을 논의하고 또 석방 이후에는 김지하 시인이 자주 다녔던 그런 가게였다. 인연이란 묘해서 처음 그 가게를 소개받은 순간 나는 이 가게야말로 내가 운영할 곳이라고 결심하고 말았다.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돌담 사이의 후미진 골목에 다 떨어진 우중충한 건물, 30평도 채 못되는 공간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는 멋진 사람들의 '아지트'로 다가왔다. 물론 탑골에는 그냥 술 마시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출판기념회가 열리는가 하면 모종의 비밀 모임도 이루어졌다. 당시 틈만 나면 데모요 성명서에다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사례가 빈번했기에 마음 편히 그런 모임이 이루어졌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의 자세한 경과나 전말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는 그 곳에 왔던 사람들의 재담이나 그러그러한 일들의 뒤에 남은 재미난 에피소드가 소중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 인물과 시대의 아픔도 자연스레 떠오를 것 아니겠는가.지금은 개나리.진달래의 꽃 천지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잠들어 있는 꽃 같은 김남주 시인. 1988년 이후 94년까지 김남주 시인은 우리 가게의 진정한 단골이었다. 물론 처음 내가 가게를 열었을 때 김 시인은 '남민전 전사'로서 재벌집을 털다 잡혀 감옥에 있었다. 석방 이전까지 시인을 위해서 석방 촉구의 밤이니 일일주막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나는 이 시인이 상당히 과격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10여 년을 감옥에 있으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 이후 직접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촌에서 갓 올라 온 농촌 총각이었다. 키는 작달막했고 얼굴은 거무데데했으며 말소리는 너무 조용하였다.석방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조용한 출옥환영회가 탑골에서 열렸다. 이시영.송기원 시인이 주도한 모임이었는데 이경자. 유시춘. 윤정모. 이혜숙. 김성동. 안종관. 정희성씨 등이 모였다. 소설가 이경자 씨가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어이 강도 시인! 그렇게 강도를 해서 얼마나 벌었나?" "벌기는 뭘 벌어. 망 보다 그 양반이 소리질러서 도망친 것인데!" "도망가서 한 두어 달 있다가 체포됐지!" 일방적으로 놀리는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이 하면서 웃고 웃기고 있었는데 김 시인은 별사람 다 봤다는 듯이 일체 대꾸가 없었고 속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3.시인의 노래

  그러나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주고받으며 서로 밉지 않게 힐난해대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 들어간 1979년도엔 유신시대의 시퍼런 칼날이 춤추던 때인지라 석방을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그러나 84년 이래 얼마간의 유화국면이 진행되면서 재창립된 '자실'을 중심으로 석방 운동이 시작되었다. 김 시인이 발표한 시를 모아 '진혼가' 라는 시집을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 처음엔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너무 과격한 주장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시집 발간 이후 그의 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고 민주화 역량도 커지면서 그에 대한 석방운동은 갈수록 힘을 얻고 있었다.정부 쪽 입장은 확고했다. 김 시인이 정치사범이 아니고 형법상 강도였다는 것이었다. 엠네스티나 국제 펜클럽을 통해 항의 전문과 석방촉구서가 제출될 때도 답은 매번 똑 같았다. 그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강도였으며 그것도 재벌에 칼을 들이댄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약간의 놀림 말을 한 것은 그동안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리는 것과 동시에 김 시인이 평생 남의 집 빗자루 하나 훔칠 것 같지 않게 생긴 데 대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서로 탐색전이 끝났다는 듯이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라니까 생각난다.  김 시인의 노래는 남인수가 부른 '고향의 그림자'였다. 그가 출옥하기 전에도 후배 문인들이 김 시인을 기리며 부르는 노래였고, 나온 후에는 그가 불렀다. 그가 영면한 후에도 그 노래는 정녕 김남주의 노래였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떠난 고향이기에" 로 이어지는 그 노래는 이영진, 김형수. 이승철. 박철. 강형철 등등 후배 문인들의 버전이 있는데 누가 불러도 그 노래는 듣는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아니, 숙연케 했다라기보다는 술 마시게 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시위가 한창일 무렵 한 쪽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어느 쪽에선가 따라하는 이가 있었고, 대개는 김 시인에 대한 연모나 그리움으로 한 덩어리가 되게 했다. 김 시인이 잡혀간 뒤 고향의 동생들이 빨갱이 집안이라는 이유로 결혼이 깨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등 엉망이 되어버린 사정들이 겹쳐지면서 그 노래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몹쓸 설움을 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아니었을지.

  어쨌든 그날 나는 김 시인의 오리지널 '고향의 그림자'를 들을 수 있었다. 약간 비스듬히 선 자세에서 눈을 감고 부르는 그 노래는 아름다웠다. 그날 김 시인은 '항구의 에레나'라는 노래에 이어 '고향의 그림자'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왜 젊은 시인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만 같았다. 시위가 벌어지거나 행사가 끝날 무렵 그 노래가 나오면 모두 따라부르던 노래, 부르다가는 마음이 심란해져서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고, 마침내는 싸움으로 이어지던 뇌관과 같은 노래.

  이야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그러나 탑골은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바탕 일하고 난 뒤 주어지는 푸짐한 밥상처럼 걸죽한 육담도 꽃을 피웠고 때로 터무니 없는 주사(酒邪)가 있어 가끔은 황량해지기도 했다. 걸죽한 육담!  백기완 선생과 천승세 선생의 '만주벌판, 독립운동 시절' 운운하는 대륙적 육담도 그렇거니와 그중 천하 제일은 소설가 황석영 선생의 그것이 아닐까.


4. 육담 대가 황석영

  "야, 복희야 너 닭 이야기 알아?" "뭔데요?" 자리에 앉자마자 술 주문도 하지 않은 채 황석영 선생이 불쑥 물어왔다. '응, 좌중의 긴장된 분위기를 일단 눙치려는 육담이겠거니' 하며 받아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말이야, 혼자 외롭게 지낼 때였는데, 시골이란 게 처음 얼마간 즐겁지 지겨운 것이거든.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 어쩌구 하잖냐, 그런 놈 며칠만 살아보라 해. 다 나자빠지게 돼있어. 그런데 그 양반 봄날 몸은 근질근질한데 어디다 몸을 풀 데가 있어야지. 그래서 궁리하는데 마침 맴생이란 놈 있잖냐, 도시에서는 염소라고 하고. 그 놈이 좌우로 찍 갈라진 뭐시기를 하고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던 게야.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뒤엔 이 사람이 그 염소 옆만 지나가면 계속 메에에햄 메에에햄 울어대는 거라. 남이 안 봤으니 다행이지만 이 양반, 속으로 무척 쑥스러웠다는 거야."

   "그래서요?" "그 뒤론 이 사람이 뭔 일이 있어도 그 염소 있는 곳은 피해 다녔다는 거지."  "그게 끝이어요?"  "그 다음이 죽여. 더 들어봐. 그 뒤로 염소보기도 미안하고 그따위 짐승들도 뭘 할 줄 안다는 걸 깨닫고 이 사람이 한참 근신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냐. 그게 맘대로 됐으면 벌써 득도했게. 그 뒤로 잘 참았는데 어느 날 닭을 보다가 그만 이 사람이 참을 수 없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자 이놈의 닭들이 그 사람만 보면 계속 꼬꼬댁 꼬꼬댁 울면서 자기한테로 왔다는 거야."

  이쯤 되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든 그야말로 웃음의 바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어느 정도 웃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얘기는 시작된다. "나도 그 얘기 듣고 되게 재미 있었거든. 그래도 의심이 생기는 거야. 어떻게 닭한테 그 모진 일을 하느냐고, 그게 어디 가당찮은 일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한 줄 아니?"
"뭐라고 했는데요?" "야, 닭이 알을 낳잖냐!"

  그쯤이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에선 눈물이 비척거리고 뒤로 넘어져 방바닥을 두드리고 있기 일쑤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하기사 황석영 선생의 입을 통하면 어떤 얘기도 새롭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라도 다시 새롭게 번안되어 싱싱한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또 이야기를 할 때는 제스처가 어찌나 풍부한지…. 물론 왼손을 주로 사용하며 흥겨운 판소리 한 대목 하듯 멋을 부리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로맨틱하다. 그래서 밀입북 때 김일성도 황 선생의 재담을 즐겼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 선생이 와서 그런 재담을 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탑골에 그 분이 왔을 때는 많은 일들이 따라왔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자실이 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 1987년 무렵에는 젊은 문인들을 '포섭' 하러 많이 왔다. 89년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이 결성될 초기에는 그야말로 우리 나라 재야문화인의 야전 사령관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왔다.그런 모임이 있고 난 뒤엔 굵직굵직한 일이 이뤄져 당국을 긴장시켰으니 재담이나 육담은 그런 신산스런 일들을 넘어가는 청량제 아니었는가 싶다.

  그러나 황 선생은 그런 재미난 이야기 말고도 노래의 천재였다. 어디서 그 많은 가사들이 어김없이 불려나와 가락에 얹혀지는지 같이 노래를 불러보면 감복할 따름이다. 그런 재담과 노래 가락이 30대 초반에 '장길산' 이란 대작을 낳지 않았나 생각한다.


5. 공개된(?) 밀입북

  울음이란 무엇일까. 탑골에서 사람들이 흘렸던 눈물을 모두 모으면 그들이 마신 술보다 더 많을까. 눈물 때문에 생긴 일들은 또 무엇일까. 아니 눈물과 함께 삼킨, 제 각각 가슴 속에 묻을 수밖에 없는 서러운 사연들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거기에 들어갈 것이 또 있다. 웃으면서 흘린 눈물 말이다. 황석영 선생은 분명 웃으면서 황량한 시대와 자신의 삶에 아프게 울고 있었다.

  "쓰다만 시 때문에 얼굴 찡그리고 있는 김사인이나 안 되는 소설로 폼이나 잡으면서 인상만 찡그리고 있는 김영현이! 그만 집에 가서 애기나 봐. 자아 자, 여기는 오줌을 누면서 힘껏 싼다고 싸는데도 구두코를 적시기 일쑤요, 결정적이다 싶은 데도 고개 숙인 순이처럼 다만 이슬방울 입에 물고 처마 밑에 쪼구라져 앉는 고것 때문에 한숨 쉬어본 아랫도리 부실한 사람들만 남아. 자, 내가 아주 기가 맥힌 소식을 전해줄 테니."

  황 선생의 뱀장사가 시작되기 전의 서설이다. 그 자리에선 내로라하는 원로든 신출내기 신인이든 모두 동급이다. 거침없이 입방아에 오르고 기약 없이 추락한다. 좌중 인물들과 그들의 작품이 촌철살인의 비평적 사설로 오르내린다. 그렇게 좌중이 모두 뱀장사 사설의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뱀장사가 시작될 때 황 선생은 허리 벨트를 풀어 오른 손에 쥐고 왼손으론 그 벨트 끝을 훑으며 마치 뱀을 쥐고 있는 것처럼 했는데 처음 본 사람은 그 폼만 봐도 신이 났다. 게다가 목소리는 단전 끝 어딘가에서부터 기어올라와 토해지는, 그래서 약간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불량한 사람이 윽박지르는 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 소리 앞에선 모두 '땅꾼 앞의 뱀'이었다.

  황 선생은 문인들 뿐 아니라 화가. 음악가. 무용가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도 함께 곧잘 탑골을 찾았다. 그래서 뱀 장사로 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김윤수. 박범훈. 채희완 선생 등 문학판은 물론. 그림판. 음악판. 춤판 등을 엮어 민중의 예술, 현실과 삶 속의 예술을 위한 민족예술인총연합회를 결성해내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파는 것이 아녀, 기회라고 생각할 때 과부 감동하고 그것 움켜쥐듯 꽉 움켜줘. 지 에미를 잡아먹은 살모사, 꽃처럼 아름다운 화사, 넘의 집 고구마 캐먹고 능글능글 걸어가다가 도라무깡(드럼통)에 물 받아놓고 목욕하는 이웃집 처녀 알몸을 훔쳐보는 놈처럼 능글능글 거무테테 시커멓기 짝이 없는 능구랭이, 먹어봐야 아무짝에도 소용 없지만 그래도 이빨 쑤실 꺼리는 된다는 물비암, 이 개구리 저 개구리 이 비암 저 비암 모두 잡아먹고 이제는 칠십 먹은 노인 아랫거웃처럼 허여진 백사. 자 골라 골라 잡아, 형편 따라 골라 잡아. 정말 될까 먹으면 될까 의심하기 조조 같은 사람, 돈 한푼에 손가락 발동기 옆에 나락처럼 떠는 사람 고런 사람은 빨리 집에 가고 자 어서어서 골라 잡아, 잡기만 하면 다 일러줄텡게…."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뱀장사의 사설이 할 때마다 달랐던 것이다. 때로는 전 대통령 등의 흉내를 내며 독재를 꼬집고 당시의 심각한 시사문제를 시원스레 희화화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시 잘 썼더라고도 하고 이러저러해 그것은 소설도 못 된다는 문학비평도 뱀장사의 사설로 담아냈다. 그 재미난 사설이 사라지고 얼마 뒤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황 선생의 밀입북이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아무도 몰래 입북한 것이 아니라 입북하고 싶은 심경을 술좌석에서 알게 모르게 털어놓고 또 요로에 있는 누구누구에게 밝혔을 것이란 것을. 천하제일의 황 선생의 재담을 들으며, 그 엉성한 곱사춤을 보며 우리는 웃은 것이 아니라 울었다. 누군가 말했다. 웃음이나 울음은 얼굴만 다르지 그 꼬리는 같다고, 어떤 신이 둘을 화해하게 하려다 안 되어서 꼬리를 붙여놨다고. 그러고 보니 밀입북 전 황 선생이 보여주던 쓸쓸함, 남과 북 사이에서 갈곳 없는 유랑의 모습도 떠오른다.


6. 문인들의 '누이'

  문인들과 어울려 있는 동안 황석영 선생은 결코 쓸쓸한 사람이 아니었다. 걸걸한 육담이 지속되는 순간 그 자리는 옛날 장터만큼이나 풍성했고 재미가 넘친다. 때로 곱사춤을 추거나 동료.후배 문인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사람들의 내면을 꼬집는 모습은 천하일품이었다.

  '세수 안 한 사슴' '침 맞은 오랑우탕' '허물 덜 벗은 구렁이' 등의 별명을 붙이면 그 해당 문인의 모습이 영락없는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소설가 윤정모 씨가 동석한 자리에선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뒷날 그것은 이혼한 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앙금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날엔 황석영 선생은 얼핏얼핏 진득한 회한이랄까 쓸쓸함을 비추곤 했다. 남을 많이 웃기는 사람들이 대개는 지독한 슬픔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윤정모 씨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푸근해진다. 문인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지만 탑골에서 만난 윤정모씨는 참으로 넉넉한 언니였다. 선배 문인에 대한 예우는 물론 후배 문인들에게도 넉넉히 정을 베풀어 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다고 여긴다. 싸움이 났을 때도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둘 다 다독이는가 하면 술 취해 잠든 이에겐 모포를 꺼내 덮어주기도 했고 새벽녘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차비를 넣어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잘못될까봐 택시운전사에게 여러 번 부탁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남편의 차에 후배들을 태워 보내기까지 했다. 키가 매우 큰 윤씨의 남편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수산물 경매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도 윤씨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탑골에 대해 분에 넘치게 아름답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은데 윤씨가 동료나 후배들에게 베풀어주던 정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윤정모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용인이었다. 당시 나는 작가 송기원. 영화감독 장선우. 신륵사 주지이던 원경 스님과 함께였는데 송기원 씨가 갑자기 들를 데가 있다고 해서 간 곳이 용인의 황새울이었다. 집에 다와 갈 때쯤 만날 사람이 "고삐" 의 작가 윤정모 씨라는 것을 알고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 즈음 반미문제를 소설로 담는 일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런 소설을 쓴 사람이니 다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의 한 구석에서 윤정모 씨를 만났을 때 그것이 기우였음을 금방 깨달았다. 윤정모 씨는 작달막한 키에 수건까지 두른 모습으로 상추를 솎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소쿠리를 던져놓고 "기원이 니 웬 일이고"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냥 왔어, 인사해 원경스님이고, 여기 '접시꽃 당신' 영화 찍은 장선우 씨고, 이 아가씨는 탑골 하고 있는 복희!" 송기원 씨가 우리를 소개했다.  "잘왔다 고마, 밥은 묵었나? 내가 직접 밭에서 딴 것으로 묵자"며 앞장 서는 모습이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던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나는 금방 윤정모씨에게 반해버렸다.

  그 뒤에 탑골에서 만났을 때 윤정모 씨는 내게 가장 편한 언니가 되었고 나는 순한 동생이 되었다. 흙 가까이 살며 쓰는 정직한 글, 때로는 사납고 거칠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살아가는 일에 가장 열성이고 진중한 사람, 그러나 동료나 후배들에게 따뜻한 고향의 누이 같은 사람. 이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89년 현대중공업 파업사태가 크게 일어났을 때 동행하면서 본 모습이다.


7. 윤정모의 작가 정신

  울산에서 노사분규가 났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있을 때와 직접 현장을 본다는 것은 사뭇 달랐다. 돌이켜보면 내가 윤정모 씨와 함께 현장에 갔다온 것이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1989년 특히 황석영 선생 방북사건이나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 있은 후에 사회는 다소 어수선했다. 그 해 2월말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때 발표한 선언이 남북간 긴장 완화와 교류 증대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금방이라도 획기적으로 변화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어두워져 갔다. 더구나 당시 남북작가회담 시도 등으로 문인들이 대거 체포.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탑골은 그런 저런 영향으로 어수선했다. 그 즈음에 윤정모 씨가 같이 바람이나 좀 쐬러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따라나섰다. 울산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할 때쯤 내가 잘못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윤정모 씨는 그곳에 가서 '투쟁현장'을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이 사회가 노동자들의 힘에 의해 크게 변할지도 모른다며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해 들어가려했으나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구의 분위기가 하도 살벌해서 나는 속으로 그냥 물러서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윤정모 씨는 입구의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주장했다.'고삐' 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며 '현대의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취재하여 글을 쓰고 또 노동자의 입장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왔다'는 얘기를 했다. 얼마 후에 우리는 엄청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작업할 때 쓰는 많은 도구들이 무기로 변했다. 골리앗 크레인도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는데 비닐이나 신문지를 덮고 자는 이도 있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꼭 이렇게 싸워야만 되는 것인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추운 데서 웅크리고 자는 것이 눈물겨웠다.

  나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적극 그들과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그 풍경이 서럽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원만히 해결되기만을 빌었을 뿐이다. 그러나 윤정모 씨는 달랐다. 그 사람들의 잠자리는 물론 식사는 어떻게 하며 투쟁의 전망은 어떠하고 밖에서 도울 일은 무엇이냐며 세심하게 묻곤 했다. 주변의 풍경을 간단히 스케치도 하고 책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격려금이라며 봉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가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윤정모라는 사람이 정말 좋은 작가라고 느꼈다.

  그 시대 문제의 중심으로 찾아가 보고 느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와 실천력을 지닌 것이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이 세상에 여러 작가나 시인이 있지만 진짜 작가는 바로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정모 씨의 글은 빠짐없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너무 사적으로 흘러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탑골을 하는 동안 때로 술꾼들 때문에 힘들고 어렵기도 했지만 결국은 배우고 느낀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나는 감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술집 주인에서 조금은 세상의 진실이 어떻게 탄생하고 작동하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을.


8. 주당(酒黨)들의 천국

  술버릇이란 것이 있다. 술을 마실 때나 술을 마신 후의 모습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쓰이는 말이겠다. 술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술꾼을 구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술꾼들을 주정파.한량파.실속파로 나눈다.

실속파는 하기 어려운 말이나 부탁을 접대라는 핑계로 술을 나누면서 은근슬쩍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부류다. 이런 사람들은 쓸데없이 심부름을 시키고 괜히 큰소리도 치곤 한다. 출판사에 갓 들어간 편집장이나 직원들이 대체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탑골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범한 고객이다.

  한량파들은 탑골에 오면 늘 환영을 받는다. 술을 마시되 지나침이 없고 점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돌아가는 사람들인데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가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도 흘러간 옛노래를 순서에 따라 학예회 하듯 돌려 부르면서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말릴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이들도 가요파와 은근파로 나뉠 수 있겠다. 탑골에서 아무리 은근한 이야기를 해도 그럴 만한 대상이 없으니 그만이다. 기껏해야 갓나온 음담패설을 스무고개 하듯 하다가 마는 정도다. 가끔 나누는 이야기는 고담준론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심해야 '그 녀석' '그 자식' 정도이니 듣기가 그다지 거북하진 않다.

  그러나 역시 문화예술계 술꾼의 대종은 주정파다. 이 주정파는 실신파와 통곡파. 주사파로 다시 나뉜다. 실신파는 마셨다 하면 끝내 실신, 가사상태가 되고 운구조가 동원돼서야 술이 끝나는 참 실신파와 소설가 현기영 선생처럼 마셨다 하면 얼마 되지 않아 장소.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고개를 꺾고 잠을 자는 '꾸벅파' 가 있다. 통곡파도 두 가지 부류다. 혐오성 통곡파와 연민성 통곡파다. 술을 마셨으면 기분을 내고 놀 일이지 왜 우는 것일까. 그런데 그 울음이 아름다워 함께 마시던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울기 시작하면 일행으로부터 빨리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말을 듣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이 각박한 세상에 울 일이 있다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이 무섭기조차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주사파(酒邪派)에 이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소신성에 음모성. 무대책성 주사파까지 있다. 술을 마시다가 비위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소신을 가지고 주정을 해대는 '소신성 주사파'는 그 소신을 만족시켜주면 잠잠해진다. 그러나 '음모성 주사파'는 안에 숨겨둔 불만이나 원한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책을 세우기도 난감하다. 이름 밝히기는 뭐하지만 그런 예술인들도 많다. 어쨌든 이쯤 되면 가끔 빈 병이 탁자 위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고 마른 안주로 내놓은 말린 무화과나 오징어가 술에 젖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약간의 소란이 있을 뿐 한두 명의 의로운 어른에 의해서 얼마든지 진압이 된다. 그러고 나면 오히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술맛도 다시 나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어른도 소용 없고 심지어 실내에 걸려있는 그림마저도 그냥 둘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뛰며 난장을 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멀쩡하던 사람의 머리에서 '빨간 물'이 나는 것을 보고서야 '광기'를 멈춘다. 이런 '무대책성 주사파' 를 만나면 그렇게 하룻밤이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아니 솔직한 말로 질린다. 먼저 우리 실신파의 맹주, 집 쫓겨난 아이 해어름의 울음처럼 슬피 울던 소설가 김성동 선생 이야기를 해야겠다.


9. '만다라'의 슬픔

  탑골을 하는 동안 가끔 나도 모르게 따라 울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소설 '만다라' 의 작가 김성동 선생이다. 김 선생은 대개 많아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왔는데 별로 말을 안 했다. 일행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며 그야말로 단아한 선비처럼 술을 마시곤 했는데 뒤에 보면 늘 가장 많이 취해 있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복희야 너 알지" "너는 알지, 너는 알잖여? 올래! 몰른단 말여?"

  갑자기 건네는 말에 처음에는 무슨 일을 안단 말인가 생각하다가도 따뜻하게 손을 쥐는 그 순간 나는 아무 말 못했다. 먼 허공을 향해 기약없이 달려가던 시선을 거두어 내 눈을 바로 보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네 알아요"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려, 술 한잔만 혀" 하며 따라주는 그런 술에 두 잔이면 쥐약이요 석 잔이면 사약인 나의 주량은 여지없이 묵살되곤 했다. 그래 그랬다. 김 선생이 쥐어주는 손은 고향 같았다. 아니 그는 너무나 따스한 오라비였다. 그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슬퍼졌고 또한 김 선생의 대책 없는 순결성이나 개인사가 지닌 비극적 삶이 자꾸 마음으로 밀려와 서러웠다.

  불과 네 살 때 6. 25로 아버지와 큰 삼촌이 우익에게, 면장을 지내던 외삼촌이 좌익에게 학살당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가 6월 어름이리라고 짐작은 하지만 어느 날인지 알 수 없어 생신날에 제사를 모시는 비극적 삶이 고스란히 얹혀 왔다. 이후 할아버지의 무릎 밑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백수문이라 일컫는 천자문은 물론 통감. 명심보감. 소학. 대학을 거쳐 맹자까지 배웠던 가난한 천재의 삶과 출가 환속으로 이어지는 극단의 외줄타기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만다라' 이후 이런 저런 실패에 가까운 소설가의 삶이 내겐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 선생은 대개 김사인. 임우기. 이은봉. 이재무. 김영현. 이영진. 강형철 씨 등 젊은 문인들과 함께 오거나 이시영.송기원. 정희성. 안종관 씨 등의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과 함께 왔다. 또한 신경림. 고은. 송기숙. 염무웅. 김윤수 씨 등 선배 문인들과 오곤 했는데 가끔은 원경스님이나 나병식 풀빛출판사 사장 혹은 민예총에서 일을 보는 김용태 사무총장 등과 함께 왔다. 특히 풀빛출판사 나 사장이나 김용태 씨와 함께 올 때는 바둑으로 거의 밤을 세웠다. 만원이나 2만원 정도가 오가는 판이었는데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바둑을 두고서 잃는 돈에는 매우 엄격했다.'문단의 국수' 였으니 양보가 있을수 없다. 그러다가 밤을 새운 날은 아침에 북어국을 끓여서 같이 먹곤 했는데 입맛이 까다로와 일반 음식점에서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테면 집에서 먹는 밥이거나 그에 방불한 그 무엇이 아니면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 선생은 술을 마셔도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분명 많이 취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보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작가나 시인에게는 매우 냉정했다. 갑자기 "그래 무슨 소설을 썼는고" 라거나 "시를 증말로 쓰긴 썼어" 라고 물으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때 그 표정이나 어조가 거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술을 마셔도 오랜 산문(山門)의 생활에서 익힌 대로 가부좌를 틀고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할밖에. 그러나 그즈음이면 김 선생은 이미 실신상태나 다름 없다.


10. 릴레이 대작

  그러나 소설가 김성동 선생이 실신한 모습은 여느 술꾼들과는 달랐다. 허튼소리 하나 하지 않으면서 점잖게 넉자배기 고사성어를 섞어 때로는 세상을 개탄하고 또 문인들을 비판하는가 하면 망가져가는 지구나 환경생태계를 걱정하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 저녁은 물론 심지어 2박 3일에 걸쳐 통음을 계속했다. 같이 마시던 사람들이 떠나도 새 사람을 불러 술을 마시니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강제로 집에 데려가야만 하기에 실신파의 맹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실신이란 말이 신체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김 선생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실신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은 김 선생과 대작한 사람들이었으니 실신하게 만드는 데도 대가라는 말이 옳겠다.

  "성님 인자 취했슈. 인젠 가야 혀요. " "얼라, 내가 취했다고. 중호 니가 취했지, 내가 취했나."  "그류. 나도 취했고, 성님도 취했슈. 인자 가요."  수염 몇 올이 독립군처럼 듬성듬성 난 윤중호 시인이 가까스로 설득하면 그때서야 문을 나오면서 구두끈을 졸라맨다. 이럴 때 때로는 현준만. 김사인. 강형철. 임우기 등등이 함께 뒷수발을 해 그들을 통상 '운구조' 라고 부르기도 했다. 운구조라는 명칭은 김 선생이 직접 젊은 후배들에게 준 이름인데 자신이 겉으로 보기엔 말짱했어도 실제로는 가사상태나 다름 없었다는 것을 밝히며 머쓱해서 하는 얘기였다.

  사실 요즈음은 술을 마시되 그렇게 목숨 걸고 마시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 대개는 차가 있다느니 아니면 집안에 급한 볼일이 있다는 둥 빠져나가기 일쑤다. 그러나 그 땐 김 선생이 후배나 선배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증말 갈껴? 가지마" 라고 말하면 대개 가지 못했다. 정도가 지나쳐 안 되겠다 싶으면 겨우 화장실을 간다고 둘러대고 도망치곤 했다.

  '머물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머문다' '그리고 마침내 삶은 떠나가는 것' 등등 김 선생 말은 하도 들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쯩' 얘기다. "복희! 자네 쯩은 뭐여?"  "쯩이라뇨?" "아, 거기는 무슨 학교를 졸업했느냐는 것이여. 나는 고퇸디, 허기사 고검퇴도 있고 중퇴도 있는디…. 요즈음은 최소 박사요, 거기다 점 찍고 교수니. 난 말여 시인 점 찍고 문학평론가 거기다가 교수라고 쓰는 작자들 안 믿어. 그자들이 한국문학의 현단계 어쩌구하는 얘기를 안 믿는단 말여. 하나나 제대로 하면 되지 뭐가 잘났다고…. 문학이란 것이 시장 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허고 좀약이니 머리빗이니 수세미를 파는 앉은뱅이의 포복 같은 것인디 요즘은 나왔다 하면 3관왕, 4관왕이니…. "

  고등학교 중퇴를 고퇴로, 고입 검정고시 낙방생을 고검퇴로 바꿔서 얘기하면서 학력 위주의 우리 사회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시할 때면 나도 맞장구를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능력보다는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 됨됨이를 판별하는 세상에 대한 한 서린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김 선생이 노래를 부를 때가 있었다. 대개는 노래를 사양하고 염불 한 토막을 하지만 도무지 어쩔 수 없을 때는 '충청도 아줌마'를 불렀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하면서 노랜지 염불인지 모르게 그윽하게, 주억주억 읖조리는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선생이 스쳐온 인생역정이 떠올라 괜히 서러워졌다.


11. '천의 얼굴' 고은 시인

  술꾼들의 풍경화를 그려본 적 있지만 그런 그림으로 도무지 그려볼 수 없는 분이 있다. 어떤 때는 아주 짖궂은 주당 같다가 어떤 때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거느린 의젓한 지도자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큰 예술가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때는 집안의 어른 같이 엄숙한 아버지 혹은 자상한 어머니 같은 모습을 볼수 있었으니, 바로 시인 고은 선생이다.

  고 선생이 탑골에 들르는 것은 대개 큰 행사 뒤거나 신동엽 창작기금이나 만해문학상 시상식 뒤여서 늘 탑골이 넘쳐났다. 그럴 때면 내실이고 홀이고 수많은 사람이 꽉 들어차 시중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한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도 고 선생의 한마디 말이면 고요해지곤 했다. 고 선생이 말할 때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연인에게 속삭이듯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분위기가 잡히면 청천벽력과도 같이 큰 목소리로 그 어조는 변하는데 그 즈음이면 끼리끼리 즐겁게 마시던 사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백미는 소련말인지 프랑스말인지 아니면 영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말의 종합인지 하여튼 국적불명의 말을 흉내내며 퍼붓는 욕설 겸 푸짐한 육담이다. 짙은 저음에서부터 시장바닥의 아낙이 싸우면서 지르는 소리까지 이르는 넓은 음역으로 펼쳐지는 그 말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잘 안 되는데 대략 흉내내면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카따라 비이아 가이 썅, 꼬데떼 네에미 썅 카따따 콩그리씨아 막 퍼줘 달라는데로 뚜치아 루붐바 오짜와 우당탕. ....."

  아무튼 그런 말로 시작되는 이상한 말을 듣게되면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배꼽의 소재를 확인하며 동시에 입으로 가져가는 맥주잔을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웃다가 술을 엎지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재미난 분위기가 있는가하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중요한 모임일 경우는 아주 진지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도 했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수 밖에. ..

  13년 승려생활과 그후의 환속, 1958년 문단에 등장한 이래 1백권도 넘어 본인도 몇 권인지 모를 정도의 무수한 저서. 또한 그 저서의 범위란 것도 시집. 소설집. 에세이집. 평전. 기행문 등 전방위의 활약을 펼치는 시인의 모습을 나같이 가방 끈도 짧고 그저 평범한 아낙인 처지에 뭐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리라. 뿐이랴. 문인이면서 동시에 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최고의 지도자급에 속하신 분이어서 수배. 체포. 감옥살이 세월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니 내가 뭐라고 말하는 순간 그런 말들은 모두 허당이 될 것이다.

  고 선생은 특히 시인 이시영 씨나 송기원 씨와 올 때 행복해 하셨는데 아마도 오랜 세월 고난이나 기쁨을 함께 나눈 탓이리라. 그렇지만 신경림 선생이나 백낙청 선생 혹은 송기숙 선생과 함께 올 때에는 참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물론 화가 여운 선생이나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선생, 때로는 소리꾼 임진택 씨를 비롯해 환경운동가 최열, 화가 김용태씨등 좁은 의미의 문단이 아닌 범 문화적인 범위의 인사들과도 자주 어울린 편이었는데 89년 남북작가회담 대표격으로 많은 작가들과 함께 버스로 서울서 판문점으로 가려다 구속된 뒤부터는 술 마시기 전에 약을 한줌씩 드시곤 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범위의 일로 만나고 일을 하셨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12. 어둔 시절의 흔적

  술도 많이 마시면서 그렇게 약을 많이 드시는 고은 선생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특히 그 약들 중엔 예전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을 때 당한 고문 후유증 약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멀쩡한 사람도 잡혀가면 그렇게 모진 구타와 고문을 받아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당시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인 분노와 증오가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라치면 고 선생께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이게 내 훈장이여'라고 말씀하시며 '날씨가 조오치, 우리 어디 갈까'라고 화제를 돌리곤 했다. 세상엔 별일 아닌 것 갖고도 생색내는 사람이 지천인 판에 그 어떤 사람보다 모진 일을 겪고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실로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감격을 느낀 것은 종로 5가의 연강홀 개관기념으로 개최된 고 선생의 시낭송회 때였다. 가끔 작가회의 행사 때 고선생이 시를 읽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시낭송 솜씨가 보통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무대가 장중하고 화려하면 할수록 그 솜씨가 빛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정한 연인의 귀에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어느덧 거대한 광장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미욱한 중생들을 깨우치듯 우렁찬 소리로 휘몰아쳐갈 때는 나도 모르게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 이것은 고 선생의 시집 '만인보' 앞에 있는 서문 중의 일부인데 그날 연강홀의 감격이 너무나 커서 평소 잘 보지 않는 책을 넘기며 내가 새로운 감동을 느꼈던 대목이다.

  솔직이 말해서 고 선생이 어쩌다 말씀하시는 날것의 육담에 질린 일이 없지 않았던 터였고 그러한 때 느끼는 이해불능의 어떤 것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그날의 감격 속에서 그리고 시집의 그 말들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통과했던 저 허무의 시대 그리고 온몸에 상처를 지니고 이 현실을 살아가는 시대의 아픔이 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의 구체적인 고통이 우리를 이만큼 살게하는 밑바탕은 아닐까 생각한다.

  "야 그래도 고 선생 너무하는 것 아녀. 그렇게 자고 나면 시집을 내니."  "그러면 어뗘, '만인보'나 '시여 날아가라' 를 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애기해도, 그렇게 많이 써도 실패한 작품이라고 말할 작품이 별루 없잖여."  "그러니까 불가사의지. 그렇게 써도 실패작이 없으니 약도 오르고."  "아 고선생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이희승 국어대사전을 그냥 다 외우셨다잖아. 거기다가 결혼 이후 마음에 안정을 찾았으니. 오랜 산문(山門) 생활에서 익힌 선시와 복잡한 인생살이, 거기다 그것에 살을 입힐 언어가 있으니 그렇게 봇물처럼 터질 수밖에."  "아무튼 괴물여,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 머리로는 이해 불능의."  "성적 욕망과 창작의 관계를 연구혀 보면 재미 있을 틴디. 고 선생은 아직도 그것을 못 참는댜."  어느 날 김사인, 이재무, 현준만, 강형철, 이승철, 박철 씨 등 젊은 시인들이 나눴던 이야기의 몇 대목이다. 후배 문인들도 그렇게 알 수 없는 큰 어른이니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옛날 한 나라를 통틀어 소리 잘하는 사람을 명창이라 했다는데 고선생은 그럼 명시인쯤 되는 것일까. 고은 선생님의 건필과 건강을 빌고싶다.


13. '제주 독립군' 현기영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비분강개성 한량파에 더하여 지칠 줄 모르는 애주가 형에 속한다. 술을 마시되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마셨다 하면 상대가 손을 들 때까지 마신다. 술 마실 때 보면 현 선생은 마치 한약을 드시듯 한다. 약간 얼굴을 찡그리되 그것을 안 먹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마신다.탑골에선 주로 맥주를 드셨는데 영업이 끝나면 24시간 해장국을 파는 집으로 옮겨가서 소주를 마셨다. 그러고도 모자라면 관철동이나 인사동 입구 포장마차로 진출해서 다시 시작하는데 그 때의 표정이 재미있다. 전혀 술 마신 사람 같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오뎅 국물에 숟가락을 댓다가 그저 간만 보고 다시 소주를 마시는데 '목을 탁 치고 넘어가는 이 맛'이 최고라며 소주예찬론을 펼쳤다. 그러면서 진짜 술꾼은 안주 없이 먹어야 한다며 후배들을 점잖게 나무라기도 한다.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소설가 김성동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 모두 변절해도 현기영 선생만큼은 변절하지 않을 것" 이라고." "그렇게 매일 그리고 그렇게도 많이 알콜로 소독 하는데 잡균이나 잡생각이 붙을 수 있겠느냐" 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현 선생은 나이든 어른들과도 술을 하셨지만 대개는 젊은 문인들과 많이 어울렸다. 시인 김정환. 채광석. 박영근. 이재무. 박철. 고형렬. 김사인. 김형수. 이승철 씨 등과 소설가 김영현. 김남일 씨 등 젊은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도 그 젊은 문인들처럼 필름이 끊어졌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후배들이 현 선생을 따른 이유는 자기들의 주정을 그야말로 어느 때고 받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보면 심지어 12시가 넘어서도 현 선생께 전화하면 거의 빠짐없이 나오셔서 대작을 해주신다고 하니 후배들이 신이 날밖에.

  제주도 4.3문제를 처음으로 소설로 썼던 '순이 삼촌' 이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그린 '바람 타는 섬' 개항기 제주도 이재수의 난을 그린 '변방에 우짓는 새' 등 줄곧 제주도 근.현대사와 관련된 소설만을 써서 '제주도 독립군' 이란 말도 동료나 후배들에게서 듣곤 했는데 선생의 그러한 음주벽은 해방 이후 역사로부터 소외당한 4.3 사태에 대한 복권의지 아니겠느냐는 설명이었다.

  "현 선생님은 언제 육지에 상륙하실 겁니까" "야, 그래도 제주도에 대해 말할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또 한 명쯤은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언젠가 어떤 평론가가 선생의 작품이 너무 제주도에 치우 친 거 아니냐는 야유성 질문을 하자 거기에 대해 답한 내용이지만 현 선생은 서울이란 곳에 몸은 있으되 고향 제주와 함께 사는 분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노래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현 선생은 노래를 부를라치면 '산타루치아'를 개사한 '쌀 타러가자'를 불렀고 흥에 겨우면 '이어도 사나'를 개사한 '이어도 산하' 를 불렀다. 본인이 어렸을 때 불렀다는 '쌀타러 가자'는 가사가 재미 있었다. "창고에 가득찬 쌀을 타러… 니 배만 고프냐 내 배도 고프다 쌀 털러 가자 쌀 털러 가자." 바리톤 가수처럼 늘여 빼는 후렴 부분에서는 웃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럴 때면 본인이 어려서 겪은 4.3 사태 얘기를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그 얘기에 주변 사람들이 심각해지면 도리어 "술이나 더 먹지" 라며 오히려 분위기를 눙쳐 주었다.


14. 진짜 애주가

  한동안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본인보다 나이가 15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에게도 망년우(忘年友)라며 서로를 편히 부르게 했다. 그럴 때면 고형렬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은 거침 없이 "어이 노형" 하고 불렀다가 한 박자 쉬고 '선생' 하였다. 아무래도 뒤가 캥겼던 것 같다. 선생이 태어난 고향 동네의 이름인 '노형리'에서 리자를 뺀 것이 그 호의 내력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부르려 하니 선생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리라.

  "아니 노형 선생, 이번에도 그 줄뻔댁한테 또 당했지요?" "말도 마, 내가 말야 10년을 넘게 공을 들이는데도 줄듯줄듯 안 준단 말야 "  "점잖게 허니까 그렇죠. 힘을 한번 쓰셔야지."  "야 그 줄뻔댁이 힘 가지고 해볼 위인이냐? 그럼 진작 주었게."  탑골이 아닌 단골집 여주인 이야기였는데 그들 모두가 다 현 선생이 소기의 성과를 못 거두고 있음을 놀리는 것이었고 그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현 선생이 술을 사랑하던 일화는 많다. 그중 재미난 것은 소주를 뜨거운 물에 부어 마신다는 이야기다. 한번은 현 선생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는데 강형철 시인의 청에 못 이겨 술집에 와서는 절대 술 못마신다고 했다가 앞에서 술 마시는 것을 보고는 물을 뜨겁게 끓여오라고 주문한 뒤 그 물에 소주를 부어 그야말로 한약 먹듯이 먹더라는 것이다. 그쯤이면 주선 아닐까?  나는 가끔 탑골 시절에 만났던 그런 문인들의 안부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데 현 선생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그렇게 해서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만큼 구수하고 재미있었다.

  그 책을 읽으며 현 선생이 왜 그렇게도 제주도 이야기만 쓰는지도 알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쪽 귀에 손을 대며 듣는지도 알았다. 어려서 겪은 열병 덕에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여서 그런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더구나 70년대 말 이래 줄곧 제주도 이야기를 한 것에는 커다란 역사적 비극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현 선생의 어린 시절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더더욱 실감이 났다. 책의 뒷부분에는 다음의 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동안의 서울생활이란 부질없이 허비해 버린 세월처럼 여겨진다. 저 바다 앞에 서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실패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현선생이 서울 생활이 모두 실패라고 말한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 동안 4.3에 대한 진상 규명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일반 사람들은 제주도 4. 3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고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근원적 모순의 발로라는 생각도 많이 갖게 되었는데 그런 공은 바로 현 선생이 선구적으로 일궈낸 것이 아닌가! 도리어 그런 말을 보면서 앞으로도 현 선생은 또 제주도에 얽힌 이야기를 쓰게 되겠구나라는 생각부터 갖는다. 제주도는 선생에게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떠나온 고향을 못잊어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현 선생이야말로 고향 제주도를, 아니 그 제주도의 비극과 진실을 불러내기 위해 소금기둥을 자청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 어멍 바다로 나가 추운 물살에 몸을 담글제"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전복이랑 해삼이랑 모두들 모여"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그렇게 매기고 받으며 늘 청년처럼 술을 마시던 현 선생, 후렴으로 따라 부르다가 모여 있는 술꾼들이 모두 하나가 되던, 힘든 그 고통들을 정겹게 넘어가던 모습은 내게 별처럼 아름답다.


15. 문인들의 격정장

  흔히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한다. 미우면 그만이고 또 미우니까 안보면 그만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러한가.미워도 자꾸 보아야만 하고 또 그러다보면 정들어 보고싶어지기까지 하는 것이 사람일 아닌가. 이재무.이승철.박영근.박철 씨 등 젊은 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또한 양문규.이원규.공광규 시인 등을 작가회의 3규라고도 했는데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탑골에 출입할 때는 모두 30대였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들에 의해 탑골은 다소 어수선했으며 동시에 재미났다. 큰소리가 난 것도, 얼마간 기물들이 손상을 입은 것도 대개 이들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얌마, 니가 문단에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선배들한테 엉기는 거야. 내감 임마 선배 앞에서 담배를 바로 핀 것이 언젠줄 알아! 선배들 심부름 하고 박박 긴 것이 5년이 지났어도 함부로 못했어."

  대개 이런 말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들을 앞에 놓고 훈계하는 이야기다.그러나 이런 말에 큰소리는 오래 가지 못한다. 후배 격인 어린 친구가 머리를 주억거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들이 선배들한테 대들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당시 80년대 후반기에는 87년 4.13 호헌조치가 취해졌을 때 이에 대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이후 6월 항쟁 때의 대응 문제, 6.29 선언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 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는 문제, 이어 벌어진 87년 대선 때 지지후보 문제, 지지방법론 문제. 그리고 88년 말 창간을 준비 중이던 '노동해방문학' 을 둘러싼 문학 노선이나 기존의 문학적 입장과의 대립갈등 문제 등등 첨예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질 때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당시는 문학적 노선이 어떠냐에 따라 모이는 사람이 달라지기도 했고 그런 노선이 불분명한 경우는 적잖은 논쟁에서 비켜서거나 서로 적처럼 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큰소리가 나면 대개의 경우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맥주잔이 엎어지고 맥주병이 탁자로부터 굴러 떨어지다가는 마침내 어린아이들처럼 멱살잡이도 심심찮게 벌어지기도 했다.그럴 경우도 주변 사람들이 말리면 대개 조용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이좋게 술 마시는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심한 경우는 맥주잔이 날아가고 벽에 붙은 그림까지 맥주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대개는 일을 저지른 문인들이 엉엉 울어댔다. 그때 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장관이다. 세상에 가장 큰 비극적인 일을 겪고 서러워서 우는 모습도 그렇게 처연할 수는 없지않나 싶다.그 경우 죽어나는 것은 가게 주인인 나나 주방에서 일하는 할머니다. 그 할머니는 전라도가 고향이었는데 입이 매우 걸걸했다.

  "아아니 싸울 티면 밖에 나가서 싸울 일이지 넘의 가게에서 왜 싸우고 지랄여. 이 아깐 안주를 다 흘려놓고 염병 지랄이 지랄여. 담부터 오면 술을 안 줘야 헌 당게. 그런디도 복희언니는 들구 주라고 혀싸니, 요담에 오기만 혀봐라, 국물도 없을팅게. " "그러니 말요. 다음에 오면 술값 말고 청소비도 받으슈. " 누군가가 할머니 말에 맞장구를 치면 그때야 할머니의 말이 멎었다. 나 또한 속이 상해 솔직한 말로 다음에는 안왔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은 보고싶기만 하니 사람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기야 지금은 그들 모두가 얼마나 의젓한가!


16. 이유있는 반항

  1989년 어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집 관할인 종로경찰서 기동타격대원 몇이 불쑥 들어와 술을 주문했다. 명색이 술집이고 저녁 여덟 시 즈음이었는데 술을 안판다고 할 수 없어 술을 팔긴 했지만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재무. 강태형. 이승철. 박철 씨 등 젊은 문인들이 뒤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홀의 한쪽에서 경찰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특히 이재무 시인은 참지 못했다. 앉자마자 나한테 저 놈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시비를 붙을 태세였다.나는 '재무씨 왜 그래. 저 사람들도 손님이야' 라며 달랬지만 맥주 한 잔 비우고 그들이 있는 곳을 노려보고 다시 또 뭐라고 욕을 했으니.

  "아니 저 자식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술을 먹는 거야. " "야 재무야 여기는 술집이여, 누구나 돈만 내면 술 마실 수 있어. " "너 재무, 외상값 갚았어. 그날 틀림없이 갚겠다고 큰소리 쳤잖어. " "뭐 외상값이야 이번 인천에 배 들어오면 갚을 거고. 썅, 이놈의 탑골을 통째로 살테니께 걱정 말고, 그나저나 저 새끼들 왜 여기 와서 술 마시는 거야, 독재자 똥개같은 자식들이!"

  분위기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다행히 강태형 시인이나 이승철 시인이 말려서 분위기가 누그러졌지만 불안감은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말을 경찰 쪽의 책임자급인 사람이 눈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당시 나는 종로 경찰서와는 사이좋게 지내야할 이유가 있었다. 자정이 넘도록 돌아가지 않고, 그제서야 찾아드는 주객들로 인한 심야영업으로 벌금을 물고 영업정지까지 당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이재무 시인이 막무가내로 계속 시비를 걸고 있었으니.

  나는 다급해져서 재무 좀 말리라고 일행 중의 강태형 시인을 불렀다."강태형씨가 어떻게 좀 혀봐, 저쪽에 사람이 계속 노려보고 있잖아" "나도 보고 있어, 괜찮아. 저 자식들 뭐라하면 한판 붙지 뭐. " "아냐, 나 겁나 죽겠어. " 그렇지만 강태형 시인은 걱정 하지 말라는 말만 하고 경찰쪽의 책임자급을 노려보며 걸어가고 있었다.내가 강태형 시인에게 부탁한 것은 우선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고,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에 권투선수였다는 것을 송기원 시인에게서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불을 끄기는 커녕 불을 지를 태세였으니 얼굴이 홧홧 타올랐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경찰의 대표격인 사내가 일행를 수습하여 자리를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그들이 가고 난 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재무 시인이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나도 쫄았거든. 그 새끼들이 뭘 알고 와서 우리를 잡아 족칠라고 그러는가 해서 말야. 그런데 역시 그 자식들도 아는 것 같애. 옛날 권투 선수가 째려본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 강태형 형하고 그 자식이 한참 눈싸움을 하더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거지. 권투선순디 지들이 죽을라고!" 그러나 강태형 시인은 아무말 없었다.

  한참 술을 마신 뒤에야 이재무 시인에게 훈계를 시작했다."너 재무 조심해라. 그 자식들하고 붙었으면 너나 나나 성하게 집에 돌아가지 못했을 거여. 그 자식 눈빛이 아주 심상치 않더라고. 서너 놈이야 어떻게 해봤겠지만 나도 그 뒤는 자신이 없더라. "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막무가내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순정적인 거부감이나 저항(?)이야말로 어두운 시대를 뚫고 나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17. 탑골의 악동들

  누구나 어디서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더구나 당시는 서슬 퍼런 공권력의 시대였다. 술취한 문인 몇 사람이 기동타격대 십여 명을 잔뜩 노려보아 그들을 탑골에서 물러가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그 날은 그렇게 무사히 지났지만 이후엔 싸움을 벌일 때가 많았다.

  1980년대 중.후반의 세월은 젊은 문인들에는 '울화의 시대' 가 아니었던가.당시 박영근. 이재무 시인이나 양문규. 이승철 시인이 왔다 하면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한마디로 '뗑깡의 대왕' 들이었다.
6.29선언이 있고 난 뒤의 일이다. 그날은 여러 팀이 왔었기 때문에 가게가 어지러웠다. 나는 이들 팀을 오가며 술을 몇 잔 한 뒤 내실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새벽녘 갑자기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와 뭔가를 찾고 있었다. 거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니 소설가 윤정모 언니였다. 나는 가까스로 수습하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이불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니 깼으니 잘됐다" 며 내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한참 만에 돌아온 정모 언니가 한마디 했다.

  "복희야, 쟈들 저래 자다가 무슨 일 안 나겠나. 저게 무슨 일이고. " "무슨 일인데요. " "마, 나 창피스러바서 말을 못하겠다. 쟈들 일어나모, 묻지 말고 해장국이나 끼리주라. "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홀로 나갔다. 홀로 쓰는 곳 옆에 긴 소파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이승철.박영근.양문규 등의 시인이 자고 있었다.키 작은 제비새끼가 집밖으로 고개만 내민 형국으로 담요에 목만 내놓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그 옆에는 놀랍게도 속옷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집으로 착각하고 속옷마저 벗어던지고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속옷이 걸려있는 것도 그렇지만 알몸으로 자고 있는 모습을 정모 언니가 보고 놀랐을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그 속옷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도 확실치는 않다. 다만 그 뒤 누군가가 정모 언니로부터 "니 그렇게 아무데서나 자다가는 시인은 커녕 사람 대접도 못받을기다" 라는 따끔한 충고를 담은 편지를 받고 그 버릇을 고쳤다는 얘기가 소문으로 돌았을 뿐이다.그러나 그런 날은 비교적 '애교' 있는 날이라고 할 만 하다.

  더욱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들이 얼마나 다급했든지 속옷을 그냥 놔두고 사라져버려 탑골 식구끼리 주인공이 누구일까를 놓고 깔깔거리기까지 했으니까. 이런 문인들이었지만 가끔씩 본인으로부터 혹은 주변의 동료나 선배문인들로부터 그들의 속내를 들을 때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눈이 아렸다.

  당시 이재무 시인은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온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인데 상경하기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경운기와 부딪쳐 비명횡사했으며 결혼생활도 파탄이 났다.더욱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사가 되기도 불가능해졌고 얼마 있던 재산마저 빚 잔치로 다 날려버렸으니 그야말로 정처 없는 신세였다.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는데 시가 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누가 보아도 뻔한 일. 그의 아우성이나 울분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8.살아남은 자의 슬픔

  1980년대 말 이승철 시인이나 박철.박영근.김형수.박선욱 등등의 젊은 시인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각각 상황은 달랐지만 처해 있는 상황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 피를 나눈 동기처럼 금방 정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이승철 시인의 경우 광주 5.18의 희생자라 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무슨 부상을 당했거나 잡혀들어가 옥살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던 중에 5.18을 만났지만 항쟁기간에는 총을 들었다 놨다할 정도로 심약한 문학청년이었다. 광주 농성동과 대인동 일대에서 그 자신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동료들이 끌려가고 부상당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했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채무의식을 천형처럼 지니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 모습은 동료들과의 싸움이나 통곡 등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고 가끔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도 드러났다.

  이승철 시인이 잘 부르던 노래는 광주항쟁 때 희생당한 박관현 열사와 이귀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불려진 노래였는데 부를 때면 한 마리 어미 곰이 잃어버린 새끼를 그리워하며 자기 가슴을 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음 사람들은 잊지 못하지, 거리마다 넘치던 그 목소리 음 우리들은 잊지 못하지, 밝아오던 마지막 새벽 하늘. 젊은 넋은 애달프고 안타까와도…" 특히 그 다음 구절 '남과 북이 하나 되듯 둘이서 하나되어' 할 때쯤이면 두 볼 위로 눈물이 어룽대곤 했는데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벅찬 감격이었다.

  광주항쟁 이후 그야말로 우연히 살아남은 친구들과 '젊은 벗들' 이라는 시낭송회를 조직하여 '그날' 의 서러운 시절을 노래하다가 83년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면서도 조금 편해질라치면 광주의 넋들에게 송구스러워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일부러 역경의 길만 가고 있었으니 그러한 서러움이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조그만 마음의 여유도 용서할 수 없는 추악한 짓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탑골에서 행사 후 뒷풀이를 하던 때였는데 이승철 시인이 김정환 시인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뒷풀이 도중 누군가 노래를 부르자 김정환 시인도 특유의 미성으로 '제비' 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승철 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정환 시인에게 갑자기 다가가서 돌연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일행은 뭔지 몰라 아우성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이승철 시인이 울부짖었다. "야, 너 김정환! 문학운동 한다는 자가 광주에서 그토록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아 정답던 얘기…' 라니 그토록 한가하고 여유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야 엉.그러면서도 광주를 팔아 명망을 얻으면 다 되는 거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여흥의 자리에서 가슴을 적시는 노래조차도 이승철 시인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였다. 여러 사람이 말리고 나중에는 누군가의 주먹다짐이 있고 난 뒤에야 종결된 그 일은 내게 너무나 낯설었다. 사실 그러한 주관적인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 받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른바 '자학' 은 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할 리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생각해보면 그들 모두는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슴에 붙이고 그 시절을 통과하던 막무가내의 청춘이었으며 세상의 불의나 부정엔 조금이라도 정면으로 돌파해가지 않는 문학운동은 무조건 인정할 수 없는 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19. 탑골의 가수들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그렇게 소란스런 시인들이 와도 아주 점잖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때가 있었다. 박선욱 시인이 끼어 있는 일행 가운데 누군가 점잖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거나 소설가 천승세 선생이 술을 마시다가 노래를 청할 때였다.

  "야 박선욱, 영락교회 성가대원!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 한자리 혀라." "아이쿠 선생님, 아직 분위기도 무르익지 않았는데 무슨 노래를. ""어허, 노래를 허라니까. 니가 노래를 불러야 쓰겄다."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 다리가 약간 불편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박선욱 시인은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박시인이 주로 불렀던 것은 '그리운 금강산' '떠나가는 배'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었는데 웬만한 성악가보다 더 잘 부르는 것 같았다.

  가끔 문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나는 그들이 글을 쓰지 않고 노래판으로 갔어도 성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그들이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면 훨씬 빨리 유명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수준급 실력에 약간의 익살만 더한다면 인기상은 떼어논 당상이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 몇 해‥. "침침한 편인 가게의 조명을 깔고 영롱하게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눈감게 하였고 오늘에야 찾을 수 있나에 이르면 누구나 눈을 뜨고 노래 부르는 이가 정녕 박선욱 시인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노래가 끝나면 재청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 이재무 시인이 있을 경우엔 '칠갑산'으로 이어져 분위기를 돋웠다. 천승세 선생의 경우 같은 목소리로 가곡을 부르곤 했다. 그때쯤이면 박철 시인이 피아노 앞으로 가서 건반을 두드리다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 나그네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어쩌고 하는 '이별의 종착역'이란 노래를 라이브 가수처럼 불러댔다.

  이시영 시인이 함께 했을 때는 굵은 목소리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보태졌고 고형렬 시인의 '파도', 이도윤 시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이은봉 시인의 '돌아가는 삼각지'등등으로 끝없이 이어져 그쯤이면 완벽한 노래 경연장으로 탑골은 변해 있었다.

  어쨌든 이들 젊은 시인들은 각기 지닌 서러움과 시대의 아픔을 술과 노래로 울었다.그리고 그 술과 노래는 대중들과 함게 하는 시낭송회, 혹은 홀로 밤 새우는 원고와의 씨름을 통해 시로 아름답게 승화하고 있었다.이재무나 이승철.박영근 등의 젊은 시인들 외에도 김주대.이원규.박남준.오철수.나희덕.차정미.이규배.김남일.현준만.이재현씨 등등의 젊은 문인들이 그렇게 탑골에서 서러움을 달래며 그야말로 젊은 한국문단의 한 축을 너끈하게 이루질 않았나 싶다.

  아프게 운 그 시절을 거쳐 이제는 그들이 어엿한 중견시인들이나 작가의 자리에 우뚝 서 있음을 신문이나 TV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요즘 나의 재미이기도 하다.그런데 그들의 약간 선배이면서 생각만 해도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인이 있다. 김사인씨다. 언젠가 황석영 선생이 그를 일러 '세수 안 한 사슴'이라 불러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늘 조용하게 술을 마셨다.그런데도 김사인 시인은 늘 선배 작가 송기원 선생의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요점은 한 자리에 앉은 여성 문인들의 마음을 송선생이 사로잡았다 생각할 때쯤이면 김시인이 순식간에 가로챈다는 것. 그말을 들을 때마다 김시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본인은 그럴 의도도, 그런 일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20. 수수께기의 사나이

  하지만 김사인 시인이 그 말을 하는 시간은 매우 길었다. 단어 하나 하나 하나, 아니 한 음절 한 음절을 발음하려다가 삼키고, 삼켰다가 다시 소리내는 형국이어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이었다.특히 고개를 45도쯤 내렸다가 슬그머니 들면서 말해 실례의 말이지만 약간 모자란 사람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더듬거려 완성한 말들은 씹을수록 맛이 있었다. 아무튼 여자 문인들이나 후배 혹은 선배 문인들과 같이 있을 때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늘 중심에 있었다.송기원 선생 말처럼 특히 여자 문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늘 수수께끼였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매력은 사람을 업무적으로나 성적으로 긴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그는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떠 그야말로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었다.특히 글쓰는 것이 느려서 사람들이 김사인에게 청탁하느니 차라리 팔만대장경에서 육법전서를 집자고 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할만큼 애간장을 녹였다.그러나 간간이 쓰인 글들은 그야말로 소쿠리에 담긴 알밤같은 것이어서 기다린 보람을 만끽하게 했으니 청탁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들 했다.일과 무관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랬다.성질이 급한 사람은 마시는 것도 취하는 것도 속전속결이었지만 김시인의 경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쟁여 넣는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한번은 5박6일 동안 탑골을 떠나지 않고 맥주와 소주를 번갈아 가며 흔들림없이 마신 일이 있었다.소설가 김성동 선생도 술을 오래 마시지만 김시인의 경우는 그보다 더했다. 김성동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좋아, 음주의 용맹정진이로고"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사실상의 백기를 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술을 마신 기간은 길었어도 양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김성동 선생이 잔을 들으면 한숨에 쭉 들이켠 반면 김시인의 경우 양주 마시듯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셨기 때문이다.또 김성동 선생의 경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속적으로 마신 반면 김시인의 경우 술집에 온 다양한 팀을 옮겨 다니면서 마시고, 피곤하면 방에서도 탁자에서도 한참 자고 또 일어나서 마시곤 했기 때문이다.그러기를 5박 6일이었으니….

  더 우스운 일이 생각난다.나흘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아 내가 조바심이 나서 "집에 안가실거예요□" 라고 물으니 "나 아무디도 안가고 여기서 기냥지냥 살쳐" 라며 막무가내였다.그쯤 되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다.결국 소반에다 마른 안주나 좀 챙겨놓고 주방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나는 그냥 잠을 잤다.그런데 한밤중에 일어나보니 김시인이 오른쪽 팔로 몸을 괴고 대접에 부어놓은 무엇을 빨대로 빨고 있었다. 맥주였다. 나는 막걸리를 빨대로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주를 빨대로 마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김사인씨! 왜 그래. 어떻게 맥주를 빨대로 마신다?"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당체 귀찮고 힘들잖여. 앉아있기도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술은 안마실 수 없으니께. 이렇게 먹어보니 편혀" 아무튼 김시인의 경우 우리를 정말 질리게 했다. 더욱 질리게 만든 것은 그 절묘한 노래솜씨였다.'산유화' 나 '고향생각'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곡처럼 우아했고 '나성에 가면'같은 템포 빠른 노래는 잔잔한 연가로 바뀌었다.더욱 우리를 매료시킨 것은 목소리였다.감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폐부를 훑는 것 같은 슬픔의 그림자가 어려있어 노래 소리의 어떤 기슭에서 목매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출처> 네이블로그 blog.naver.com/ohyh45 (송풍수월)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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