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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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인들의 술 풍경(상), “술이 문학 잡아먹어? 문인이 술 잡아먹어?” 


문인들의 술 풍경(상)


“술이 문학 잡아먹어? 문인이 술 잡아먹어?”


문인과 술, 그 불콰하면서도 들쭉날쭉한 포옹





  술과 문학. 문학과 술은 피붙이인가, 살붙이인가. 문학과 술은 피붙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 있는 곳에 늘 술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살붙이는 그 술을 함께 마시는 문학 이야기다.
  그 술과 함께 먹는 안주처럼 마구 씹히는 게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인들과 술. 그 오묘한 풍경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막걸리를 즐겼던 故 천상병 시인 

  문인들은 술을 좀 더 좋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길목에 선 노리개쯤으로 여긴다. 문제는 그 술을 다루는 문인들 속내에 있다. 술을 기생오라비처럼 살살 잘 다루는 문인이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삭이지 못해 술에게 분풀이하는 문인도 있다.  

  한국문단을 이야기하자면 술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문인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문단이 지닌 속내를 더듬을 때 술이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처럼 꽤 서운한 까닭은 따로 있다. 문인들과 술에 얽힌,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몇 번이나 해도 모자랄 만큼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옛말에 술은 ‘술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했다. 문학은 다르다. 문학작품 한 편을 쓸 때도 술처럼 그렇게 술술술 잘 써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인들은 한 작품을 준비할 때 술처럼 술술술 나오기 바라면서 술을 술술술 마신다. 한 작품을 끝냈을 때는 술을 더욱 즐겁게 술술술 마신다.

  술과 문학은 앙숙이자 살가운 벗이다. 술이 어떤 때는 문학과 문인을 통째 잡아먹기도 한다. 문학과 문인이 어떤 때는 술을 통해 이 세상을 깡그리 잡아먹기도 한다. 문학과 술, 문인과 술은 수없이 맞붙어도 언제나 무승부다.  


술과 문학은 앙숙이자 살가운 벗 

  21세기 들어 젊은 문인들은 술을 ‘너무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해서도 안 된다’(不可近不可遠)며 술좌석에 은근슬쩍 끼었다가 약삭빠르게 잘도 빠진다. 지난 1980~90년대에 그런 약삭빠른 짓거리를 하다간 문단에서 살아남기(?) 꽤 어려웠다.

  시대가 어두운 탓도 있었다. 먹고살기도 너무 빠듯했다. 문인들은 그때 술을 살가운 동무로 삼아 슬픈 절망을 이겨냈고, 술과 안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경남 하동 출신인 정규화(1949~ 2007) 시인이 오죽했으면 “서울에 가서 유명한 문인들을 만났더니 아침부터 술만 자꾸 사주더라.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말이야”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정 시인은 문학인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요금을 달라고 하자 마치 시인이 큰 벼슬이나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나, 시인이여!”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그냥 가려 했다. 정 시인은 그 자리에서 파출소까지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술과 문학, 문인과 술

  이 둘 사이에는 배꼽을 잡고도 웃지 못 할 무슨 우스꽝스러운 일이 그리 많이 있었던 것일까. 술이 문학과 웃통을 벗고 죽자 사자 싸우고, 문학이 술에 온몸을 던져 싸운 까닭은 무엇일까. 원고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때, 그 가난한 문인들이 왜 남보다 술을 더 좋아했을까. 다음 술 이야기에 나오는 문인들이 ‘이 새X 이거 정말 미친놈 아냐?’라며 글쓴이 뺨따귀를 거세게 때릴지. 괜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술에 젖어서 산다 
  피에 젖어서
  똥에 젖어서
  사는 거보다
  나은 일이다
  한 말의 술을 마시고
  한 말의 오줌을 싸면
  나는 텅 빈다

        -최명학 ‘술’ 모두  


  1970년대 끝자락. 내가 시인이 되는 꿈을 꾸며 열심히 시를 쓸 때 고향인 경남 창원에 있었다. 그때 자주 만난 문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환경시인 ‘독수대’를 쓴 이선관(1942~2005) 시인과 최명학(1952~2002) 시인이 있다.

  이 시인은 한 살 때 백일해 약을 잘못 먹어 한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뇌성마비 2급 장애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최 시인은 군에서 제대한 뒤 곧바로 어머니를 따라 마산으로 이사를 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최 시인은 그때 마산 부림시장 주변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작고 허름한 대폿집에서 툭하면 글쓴이와 술벗을 삼았다. 그는 ‘탁주 반 되는 밥 한 그릇’이란 표어가 나붙은 그런 대폿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배가 너무 고프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나를 술벗으로 삼은 까닭도 사실은 배가 고파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였다. 글쓴이는 그래도 그곳이 아버지께서 논 서너 마지기를 짓고 있는 고향이었기에 가끔 마시는 막걸리 값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하루는 어스름이 질 무렵 최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산 창동 골목에 있는 잔술집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때 마산 창동 골목에는 정종 한 잔(맥주컵)을 따뜻하게 데워 파는 잔술집이 꽤 많았다. 그 잔술집들은 1000원짜리 정종 한 잔만 시키면 안주가 10가지 넘게 공짜로 무한정 나왔다. 술시중을 드는 예쁘장한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 아가씨들에게 술시중을 받으려면 정종을 한 잔 시켜줘야 했다. 아가씨들은 잠시 앉아 술시중을 들다가 순식간에 정종 한 잔을 쪼옥 빨아 마신 뒤 한 잔 더 시켜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시가 곧 술이고, 술이 곧 시야. 좋은 시를 쓰려면 이 술을 애인 삼아야 해. 한 잔 마셔. 왜 그리 술을 베어 마셔. 술값 땜에 그래? 걱정 마. 이 집은 내 단골이어서 외상을 달아놔도 돼.”

  최 시인이 이때 한 말은 자기 이름으로 외상값을 달아놓을 테니 나더러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었다. 선배문인이 그렇게 말하니 무작정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머리를 번쩍 하고 스치는 게 있었다. 최 시인은 말술을 마시는 문인이어서 잔술을 마시다간 술값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처럼 말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대병 한 병을 시키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싸고 많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히야~ 니도 간뎅이가 부었구먼. 시 한 편 건지는 건 양에 안 차니까 아예 시집 한 권을 건지자 이 말이네.” 

  “얼씨구!” “절씨구!” 


“가시나야, 수류탄 안전핀 다 뽑고 콱 죽어뿌자” 

  그날, 정종 대병 한 병을 시켜 주전자에 반쯤 따라 데워가며 이선관, 최명학 시인과 함께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를 외치며 잔을 수없이 부딪쳤다. 아가씨들도 신이 났던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우리 일행들 볼에 쪼옥~ 소리가 나도록 들이댔다. 볼록한 젖탱이를 어깨와 팔에 슬슬 문지르며 갖은 아양을 떠는 아가씨도 있었다.

   “○○양! 니 가슴 양쪽에 단 그 멋진 수류탄(젖가슴) 안전핀을 뽑으려면 어떡해야 돼?”

  “수류탄 하나에 대병 한 병씩이니까 두 병째 시키면 양쪽 안전핀을 다 뽑을 수도 있어예.”

  “요 가시나들이 굉장히 못된 년들이네. 대가리 소똥도 제대로 안 벗어진 것들이 잔머리만 늘어가지고. 그래. 기왕 베린(버린) 몸, 한 병 더 가꼬 와뿌라 고마(가져와라). 올 가시나 너거캉 우리캉 수류탄 안전핀 다 뽑고 같이 콱 죽어뿌자.” 

  우리 일행은 아가씨들과 그렇게 제법 진한 농을 주고받으며 정종을 세 병 남짓 마신 뒤 밤 10시가 훨씬 넘어 그 술집을 나왔다. 아가씨들이 ‘수류탄 안전핀까지 뽑아놓고 그냥 가면 어떡하냐’는 소리를 귀로 흘리며.  

  나는 창동에 살고 있었던 이 시인을 부축해 집까지 모신 뒤 최 시인과 택시를 잡아탔다. 창원으로 가는 길목인 북마산에 살고 있었던 최 시인과 같이 타고 가다 내려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최 시인과 어떻게 헤어진 줄은 지금도 모른다. 택시를 타자마자 졸았기 때문에. 그렇게 비몽사몽 창원에 닿아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어어~ 하는 순간 그대로 논둑 아래 물꼬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래도 시원했다. 잠시 그렇게 물꼬에 올챙이처럼 처박혀 있으니 술이 어느 정도 깨는 듯했다. 어떻게 집에 갔는지도 몰랐다. 그 다음날 새벽, 그야말로 온 집안이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저 아 저기 완전히 미쳐뿐 거 아이가. 간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온몸에 진흙탕을 잔뜩 덮어쓰고 오지 않나. 겨우 씻겨가꼬 재워놨더니 방 벽이 통시(화장실)인 줄 알고 오줌을 철철 갈기지를 않나.”

  "수류탄! 수류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터진다’니…. 그기 무슨 말이고. 아무리 잠꼬대라 캐도 뜬금없이 수류탄이 웬 말이고. 지뢰밭에라도 댕겨왔나.”마산과 창원, 진해 등지에 있는 문인들이 자주 가는 술집은 막걸리와 소주, 맥주 등을 골고루 파는 ‘고모령’과 소주와 맥주만 파는 ‘성미’였다. 그 다음으로 자주 찾은 곳은 부림시장 안에 있는 ‘독수대’(이선관 시인 시 제목을 따서 지었음)와 부림시장 난전, 고갈비(고등어구이) 집, 어시장 난전 등이었다.  

  그 술집에서 자주 만난 문인은 시인 정진업(1916~83), 박재호(1927~85), 황선하(1931~2001), 이광석, 정목일, 김태수, 김종석, 하길남 등이 었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즐겨 마셨지만 술주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 점잖은 문인들이었다.


대한민국 갖고 노는 대한민국 소설가들

  1980년대 허리춤께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문학을 제대로 하자는 야무진 꿈을 품고. 나는 그때 서울에서 살고 있는 고향 선배 정규화 시인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정규화 시인을 만나면 뭔가 제대로 된 문학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나를 그런 문인들에게 소개할 것만 같았다.   

  그런 어느 날 하루는 정 시인을 만나기 위해 북한산으로 갔다. 정 시인이 북한산 계곡에서 문인 몇 명과 개를 한 마리 잡아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마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구파발에서 북한산 쪽으로 1㎞ 남짓 올라가면 왼편으로 민가가 몇 채 보이는 숲 속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날,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저만치 바위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쭈욱 내밀며 올라가자 소설가 박태순과 강승원, 안석강, 구중관, 시인 정규화, 출판인 김규철이 계곡에 개고기가 담긴 시커먼 솥단지를 걸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4홉들이 소주를 수십 병째 비우고 있었다. 그분들을 향해 일단 고개부터 꾸벅 숙인 뒤 가까이 다가가자 정 시인이 나를 소개했다.

   “이소리라고, 시를 쓰는 친구입니다.”

   “소리? 소리 아버지 쏘리, 소리 아들 쏘리, 소리 형도 쏘리….”

   “그래? 잘 왔어. 앉어, 앉어.”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 짱구, 짱구 형도 짱구….”  

  소주에 거나하게 취해 ‘짱구타령’을 부르던 박태순 소설가가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내게 주더니 어서 마시라는 손짓을 했다. 소주를 한 잔 쭈욱 마신 뒤 박태순 소설가에게 잔을 건네자 이번에는 안석강 소설가가 개고기 한 점을 내 앞에 기세 좋게 내밀었다.

    “선생님…전…개고기 못 먹습니다.”

    “이 친구 이거 봐라. 경상도 촌놈이 이렇게 맛있고 몸에 좋은 개고기를 못 먹는다고? 이 친구 이거 웃기는 친구로구먼. ‘고향 앞으로’ 해서 개고기 먹는 법부터 배워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되겠구먼.” 

  개고기를 앞에 놓고 먹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박태순 소설가가 측은하다는 듯이 한마디 툭 내던졌다. 

  “뭐 하러 서울까지 올라왔어. 그냥 고향에서 조용히 글을 쓰면 될 걸. 서울이라고 시골보다 별다른 게 있겠어. 입에 풀칠하기는 시골보다 조금 나을지 몰라도 서울살이는 인정사정, 피도 눈물도 없는 동네야. 규화야, 너가 이 친구 많이 도와줘.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 짱구, 짱구 형도 짱구….”
   “….”

소설가 강승원과 구중관, 시인 정규화, 출판인 김규철은 박태순, 안석강 소설가가 하는 얘기에 빙긋 웃으며 개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만 계속 홀짝거렸다. 그렇게 30여 분쯤 지났을까. 입만 열었다 하면 청산유수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왕구라’에 목소리가 가장 센 안석강 소설가가 김규철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규철아! 너 지금 눈에 콩깍지 씌었냐? 소주가 또 다 떨어졌잖아. 어르신들이 몸소 개고기까지 삶아 젊은 넘 몸보신까지 시켜줬으면 이깟 소주 정도는 눈치껏 척척 조달해야 되지 않아.”

   “이거 큰일이네요. 요 아래 가게에 있는 소주는 좀전에 떨이 해버렸거든요. 어쩌죠?”

   “야 이 ××야! 그게 말이냐? 말똥덩어리냐? 저 아래 마을에 가서 사오든가 구파발까지 가서 사오든가 그건 네 자유야.” 

  “돈은요?” 

  “아, 북한산 산신령인 김규철이가 북한산 바닥에서 돈이 없어 소주 몇 박스 못 사온다고 하면 말이나 돼? 얼른 가서 나 팔고 아예 소주 10박스쯤 가져와.”“이곳에 살지도 않으시는 선생님께서 여기 있는 가게주인들을 어찌 다 아십니까? 북한산 산신령인 저도 잘 모르는데요?” 

   “난 북한산 산신령보다 훨씬 더 높은 대한민국 소설가야, 소설가! 대한민국 소설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게 똥종이지, 어디 사람 ××야. 별것 아닌 봉이 김선달이도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는데, 명색이 대통령도 당선시켰다 떨어뜨렸다, 그날 기분에 따라 맘대로 갖고 노는 대한민국 소설가가 소주 몇 박스에 좌지우지하면 되겠어.”


술잔 때문에 단골 술집 바꾼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 몇 토막)라는 시를 남기고 정말 하늘로 돌아간 시인 천상병(1930~93). 젊은 날에는 소주, 맥주 등 닥치지 않고 마구 마셨던 그도 말년에는 막걸리를 즐겼다.  

  그가 경기도 의정부에 살 때 자주 가던 단골 막걸리집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천 시인이 갑자기 단골 막걸리집을 버리고 다른 막걸리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천 시인 부인 목순옥 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즘 새로 가는 막걸리집 주모가 아주 예쁜가 보죠?”

   “문디 가시나 아이가. 그 막걸리집은 예전에 다니는 그 집보다 술잔이 훨씬 더 크다 아이가.” 

  시인 천상병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참 많다. 한국문단에는 시인 천상병에 얽힌 여러 이야기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어이가 없는 일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터진다.

 내가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에서 총무 간사를 맡아 일할 때도 그랬다. 시 ‘국토’로 널리 알려진 조태일(1941∼99)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을 1988년 들머리께 있었던 ‘양주 오바이트 사건’도 그랬다.

 시인 조태일은 생맥주를 참 좋아했다. 대낮이든 저녁이든 밤이든 그는 생맥주집에 들어가 앉으면 500cc 생맥주를 10잔 이상 연거푸 마시곤 했다. 안주도 잘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것은, 그는 아무리 생맥주를 많이 마셔도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넘들이 그기가 왜 그리 짧아! 그렇게 파닥거려서야 제대로 된 시나 소설을 쓸 수 있겠어. 술도 문학과 쌍둥이인데, 느긋하게 발효를 시킬 줄 알아야지.”

   “선생님! 그 비법 좀 알려주십시오.” 

   “비법은 없어. 시인이 타고나는 것처럼 술꾼도 타고나야 하는 거야.”

  조 시인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침 일찍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로 나왔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생맥주를 마실 때만 빼곤 거의 입에 문 채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말도 별로 없었다. 꼭 해야 할 말만 했기 때문에 그가 지닌 속내를 읽으려면 얼굴표정을 보면서 눈치껏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침에 나왔다가 점심 때가 지나 오후 3~4시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데리고 가까운 ‘아현생맥주’ 집으로 자주 가곤 했다. 그날도 오후 3시쯤 조 시인을 따라 아현생맥주 집으로 갔다. 그는 그날따라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지 생맥주 500cc를 열 잔 넘게 연거푸 마시더니 꽤 이른 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맥주 500cc 10잔이 기본인 조태일 시인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선생님, 좀 취하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걱정 마. 이깟 생맥주 몇 잔에 무너질 내가 아니야. 택시 잡아, 택시!”

  죽형(竹兄) 조태일 시인은 키가 180㎝에 달할 정도로 컸고, 덩치도 아주 좋아 문단에서는 ‘거구’로 불렸다. 그런 그가 생맥주집을 나서면서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얼른 팔짱을 끼었으나 너무 힘에 부쳐 택시를 잡기 위해 서 있다 몇 번이나 같이 길바닥에 나뒹굴곤 했다. 택시 또한 슬며시 다가왔다가 그가 약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곤 그대로 쌩 달아났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그와 택시와 씨름을 하다가 겨우 택시를 잡았다.

   “방배동 쪽으로 가주세요.” 

  그는 택시에 타자마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문제는 택시가 그가 살고 있는 방배동 가까이 닿았을 때였다. 운전기사가 물었다.

   “방배동 어디쯤이세요?”

  나는 서둘러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동안 한번도 그가 사는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는 집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몰랐다. 그렇게 그와 2~3분쯤 실랑이를 한 끝에 그가 부스스 눈을 뜨면서 말했다. 

   “운전기사가 알아서 해.” 

   “뭐라고요?”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할 수 없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부축해서 택시에서 내리자 그는 저기 보이는 포장마차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혀가 약간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만 드세요. 댁이 어디세요?”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여기 포장마차로 나오라고 그래.” 

   “네.”그는 포장마차에서도 잠시 졸더니 사모님이 오자 어느새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총무간사가 말이야, 상임이사 집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조 시인 집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에 있는 방이 그가 쓰는 서재였다.

   “여보! 여기 술상 좀 차려!”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그냥 과일이나 드세요. 이 시인은 오늘 우리 집에 첨 오셨는데 미안해요.”

  사모님이 사과와 배, 딸기가 수북이 담긴 접시를 2층 서재에 올려놓고 내려가자 조 시인이 빙긋 웃었다.

   “이소리, 걱정 마! 내 그럴 줄 알고 여기 양주 몇 병을 숨겨두었지.”

  조 시인이 큰 글라스에 양주를 가득 따르더니 쭈욱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몇 잔 연거푸 마시자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조 시인이 내려간 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아차! 여기가 조태일 선생님 댁이지’라는 생각에 후다닥 일어났다. 겨우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려던 나는 기겁을 했다. 자다가 나도 모르게 이부자리에 ‘오바이트’를 하고 만 것이었다.

  큰일이다. 이를 어쩌나. 서둘러 이부자리에 쏟아놓은 내용물을 휴지로 대충 치우려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조태일 시인이 또다시 크게 불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부자리 위에 휴지를 둘둘 말아 덮은 뒤 이부자리를 한곳으로 대충 밀쳐놓고 1층으로 내려가 조태일 시인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혀가 까끌까끌한 게 밥알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과 함께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2주일이 흘렀다. 조 시인은 그동안 사무실에 몇 번이나 왔다가 나와 함께 생맥주를 마시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문인이 내게 직격탄을 던졌다.

   “이 시인, 그대가 최근 ‘양오사’를 세게 터뜨렸다며?”

   “‘양오사’(양주 오바이트 사건) 그게 무슨 말이죠? 그리고 누가 그래요?”

   “소문에 따르면 이 시인이 조태일 선생 댁에 가서 비싼 양주 마시고 자다가 이불에 오바이트를 한 뒤 치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던데?” 

   “입이 천금처럼 몹시 무거운 조태일 선생님이 문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을 텐데….”
   “글쎄?”


<출처> 신동아 /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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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그릇 / 이항녕(李恒寧)   
1431
54
한 눈 없는 어머니 / 이은상(李殷相)   
1145
53
감사 / 임옥인   
1058
52
방망이 깎던 노인 / 윤오영(尹五榮)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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