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학의 시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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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무 / 이양하(李敭河) 

나 무

이양하(李 敭河)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搏)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날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 말로 바람쟁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하는 법이 없다.

  깊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대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을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나무는 소위 윤회설(輪回設)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끝>


이해와 감상

  1964년에 나온 수필집 <나무>의 표제작이다. 이양하의 이양하다움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그의 고독한 생활, 소박한 자세, 자연과 친구에 대한 사랑, 감사하는 마음들이 나무 위로 잘 겹쳐 있다.뿐만 아니라 나무에는 그가 인간에 대해 소망하는 인간성의 모든 조건들이 드러난다. 나무가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욕망에 사로잡혀 허덕이는 인간의 본성과 대비되는 것이요, 나무가 고독하다는 것은 인간 또한 나무처럼 의젓하게 그것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달과 바람과 새가 나무의 친구라는 것은 주변사람들에게 두루 너그러워지리라는 경구인 것이다.

  나무가 지닌 속성을 인간에 비교한 교훈적 내용의 수필이다 . 나무는 안분지족의 현인, 고독의 철인, 훌륭한 견인주의자로 비유되고 있으며 , 지은이는 자신의 인생관을 나무의 덕에 비유하면서 나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낸다. 대상에 대한 깊고 애정 어린 성찰을 담담하고 관조적인 어투로 형상화시킨, 이양하 수필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나무를 의인화하고 빼어난 대조법이 구사되어 읽는 맛이 경쾌하기 짝없는 이 글은 현대인의 가벼운 삶을 통찰하고 질책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아무로부터 바람직한 인간성을 유추해 놓은 것도 재미있지만 구름이나 새 또한 그런 경향의 인간형들을 상징케 한 것 같다.

  나뭇가지가 위로 뻗힌 것을 하늘을 향해 묵도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읽은 것도 시인다운 눈이다. 끝 구절에 <무슨 나무가 될지는 가리지 않으련다>라고 살짝 방기해놓은 맛 또한 입에 웃음을 띠게 하는 재미요 여유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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